김형은(언론·05년졸) BBC코리아 기자
김형은(언론·05년졸) BBC코리아 기자

낮인데도 밤같이 어두운 날이 있다. 하늘은 온통 회색이고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할 수 없는 그런 날. 지난 2018년 5월 어느 날, 나는 한 중년 여성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는 다소 어눌한 말투로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을 설명했고, 나는 처음 가보는 서울의 한 작은 동네를 몇 바퀴 돈 끝에 그가 사는 집을 겨우 찾았다. 그는 탈북 여성이다. 핵실험장으로 잘 알려진 북한 풍계리 근처에서 나고 자랐다.

당시 북한은 비핵화 협상에 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고, 주요 외신들은 주로 핵실험장이 어떻게 폭파될지에 초점을 두고 보도했다. “이 순간에도 내 형제들은 그 땅이 오염된 것도 모르고 산다”며 이 중년 여성이 울먹이며 제기한 피폭 가능성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2004년 아리랑국제방송에 입사하며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코리아중앙데일리와 BBC코리아까지 16년 넘게 영어방송, 영자신문, 외신을 통해 한국 뉴스를 보도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건 외신이 한국 뉴스를 다루는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 핵실험장 폭파에만 초점둔 외신

그 뒤에 감춰졌던 탈북 여성의 눈물

외신의 한국 뉴스는 대부분 ‘북한’이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북한 이슈는 점점 중동 이슈처럼 되고 있다. 오랜 기간 해결하지 못해 대책이 요원함에 따라 사람들의 주목도가 낮아지며, 동시에 이를 다루는 뉴스 역시 다층적(multifaceted)이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풍계리를 핵실험장이 아닌 고향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전화를 돌렸던 이유였다. ‘어딘가 멀리 존재하는 괴상하고 위험한 나라’로 북한을 보는 인식을 조금이나마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있겠구나’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엄마는 아직 있겠구나’ 같은 생각을 핵실험장 폭파 뉴스와 함께 잠시나마 전 세계 독자들이 상기하기를 바랐다.

감사하게도 2018년 5월 24일 폭파 당일, ‘풍계리를 고향으로 기억하는 탈북자’라는 내용으로 BBC 생방송에 출연했다. 핵실험장 폭파를 다룬 톱뉴스에 이어진 보도(follow-up piece)였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뿌듯한 순간이었다.

대부분 외신은 한국 지국에 외국인 특파원과 함께 한국인 특파원(bilingual correspondent)을 둔다. BBC코리아에서 내 역할인데,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외신의 한국 뉴스가 편견 혹은 오해에 기반한 걸 방지할 수 있어서다. 외신이 한국 뉴스를 다루는 문법을 바꾸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물론 그 한국인 특파원의 보도국 내 존재감(editorial presence)이 얼마나 큰지, 또 기자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같은 뉴스룸 다이내믹(newsroom dynamic)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외신이 한국 뉴스로 북한, 삼성, K팝 등을 짧게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현재 육아휴직을 내 미국 뉴욕에 머물면서 뉴욕지역 공영 라디오방송(WNYC)을 매일 듣는다. 한국 뉴스는 굉장히 가끔, 또 짧게 나온다. 전 세계 미디어가 제한된 방송 시간(air time)을 두고 경쟁을 하고 있는 현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있다. 상당수 외신 기자들은 한국을 굉장히 흥미로운(exciting)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뉴스 산업이 좋지 않아 구조조정이 활발한 것과 달리 주요 외신의 한국 지국은 다행스럽게도 아직 그런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뉴욕타임스(NYT) 홍콩사무소 일부는 서울로 이전한다고 한다.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이다. 주인공 조는 가족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는 것을 망설이며 말한다. “누가 가정의 어려움과 기쁨(domestic struggles and joys)에 관심을 두겠어? 그게 중요하기는 할까?” 동생 에이미는 묻는다. “사람들이 그걸 안 쓰니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 아냐?” 이에 조가 “써서 중요해지는 게 아니라 중요하니까 쓰는 것”이라고 반박하자, 에이미는 다시 단호하게 말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쓰면 중요해지는 거야.”

평범한 한국 여성의 고충(struggle)을 다룬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서울 오피스텔에 사는 여성 5명의 이야기를 그린 「If I Had Your Face(너의 얼굴을 갖고 싶어)」(프랜시스 차) 등이 서구권에서 출간돼 화제가 됐다. 에이미의 말마따나 ‘한국인 혹은 한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기쁨이 전세계에서 중요해지려면 우리가 쓰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희망을 품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외신에서 힘쓰고 있는 한국인 기자들을 그 누구보다 응원한다.

김형은 BBC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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