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청춘이다.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시절에 걸쳐있는 시간. 사람들은 흔히 청춘이라 하면 젊음의 패기, 이 시간이 지나면 하지 못할 경험, 나이가 용서하는 경험을 떠올린다. 하지만 과연 내 청춘은 무엇으로 가득한가. 내 청춘은 여행, 젊음, 취미, 경험이라는 단어보다 공부, 노력, 땀에 가까운, 들끓는 청춘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사회가 정해버린 청춘대로 흘러가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까지도 해봤다.

9월7일. 그날은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2학기 개강 첫 주, 코로나19가 한창이었기에 난 어김없이 자취방에서 밥을 해결하고 올클한 시간표를 보며 뿌듯하게 공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래 대학생은 개강 첫 주가 가장 여유롭다. 일찍 잠들기 싫은 마음에 비좁은 자취방에서 운동을 한 후 씻고 나왔더니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오전12시19분에 걸려온 뜬금없는 전화를 의심 없이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숨이 막혔다. 편찮으신 건 알고 있었지만, 죽음을 예상해야 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어쩌면 변명일 수 있겠지만 학교, 동아리, 과제, 대외활동으로 서울에 머물던 나는 할아버지께 그동안 가지 못했었다. 할아버지께서 진정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찾아 봬야 했다. 내 두 번째 실수였다.

2018년 10월9일 할머니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할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신 후 매일 뵈러 갔지만, 수시 모집이 시작되고 ‘할머니는 나중에 보러 갈래’라는 말이 습관이 됐다. 수시 원서 접수 마감 후 여유가 생겼고 할머니를 뵈러 가기로 한 바로 전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바쁜 시간 때문에 만남의 미룸이 습관이 되고, 결국 만남의 장소가 안치실이 됐던 끔찍한 그 순간을 다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첫차를 타고 할아버지의 임종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오전4시, 극심한 복통과 고열로 화장실에 주저앉아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연아, 할아버지 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할아버지가 걱정돼 전화한 줄 알았다. 내 울음소리도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눈물로 알았다. 나는 그 순간 실신을 하고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아 응급실로 향했다. 열이 38.9도였다. 졸지에 코로나19 의심 환자로 격리됐고 진료소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견뎠다.

멈추지 않는 구역질과 고열 속에서 나를 가장 아프게 한 건 죄책감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에 이어 어리석게 또 실수를 저질렀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빴어?”라는 죄책감에 이상한 사람처럼 길거리에 서서 펑펑 울었다. 3개월 만에 그를 집이 아닌 참관실에서 마주할 줄은 몰랐다. 죄책감에 이토록 시달려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가 떠나신 후, 할아버지는 육체만 움직일 뿐 정신은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정지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자꾸만 할머니 곁으로 가고 싶어 하셨고, 어쩌면 그게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애써 내 죄책감을 씻으려 했다.

납골당 부부관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봉인돼 있다. 지금쯤 아픔 없는 하늘에서 그들은 각자가 땅과 하늘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이야기하고, 꽃구경, 강 구경을 하며 행복해하실까. 납골당에 가면 회의감이 든다. 할머니부터 할아버지의 죽음까지 2년, 그리고 똑같은 실수. 난 2년이 지나도 어김없이 바쁜 현실에 스스로를 가둬 놨다. 들끓는 청춘 속 너무 바쁘게 살았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에 없었다. 부질없다는 허무함이 나를 지금까지 괴롭힌다. 부디 청춘이 아름답기만 하면 좋겠다. 바삐 살다 사랑을 잃는 슬픈 청춘보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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