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은(국문·95년졸) 출판편집자
이수은(국문·95년졸) 출판편집자

명절에 받기 싫은 선물 1위로 ‘책’이 꼽혔다는 기사를 봤다. 지당하다. 선물은 기왕이면 쓸모 있는 것을 받고 싶고,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 없는 현금이 제일이다. 전공책에 취업준비용 각종 수험서를 사기에도 용돈이 빠듯한 대학생이라면, 고전 필독서는 제목만 들어도 입시 스트레스가 되살아나는 듯 가슴이 답답해지겠다. 제아무리 훌륭한 양서라도 그게 당장의 기쁨이나 손에 잡히는 이익에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예를 들려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9800원짜리 산양유 비누만큼의 효능감도 주지 못하는 책을 20년간 만들어오다 자포자기해서 결심하게 됐다.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책을 꾸역꾸역 펴내기만 할 게 아니라, 한 명이라도 더 책에 관심을 갖도록 독서의 즐거움을 알리는 책을 써보자. 운동 싫어하는 사람에게 헬스클럽 전단지를 나눠주는 알바생의 심정으로, 제목도 공손하게 존댓말로 지었다.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그랬더니 책을 사 봤다는 리뷰가 뜨문뜨문 올라오는데, 아뿔싸, “책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이란다. 그렇다. 애초에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은 누가 뭘 권하든 “어쨌든 난 별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책 좀 읽어주십사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고전을 정독하면 인생에 후회할 일 하나쯤은 거를 수 있다, 정도의 신중한 주제가 될 예정이다. 때는 27년 전, 대학교 3학년 봄이었다. 십대 때부터 내가 읽은 책은 서양고전이 대부분이었는데, 대학에선 국문과를 다니다보니, 외국문학 전공자들은 어떻게 고전을 읽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불문과 교수님께 찾아가 다짜고짜, 청강을 하고 싶은데 프랑스어는 한 글자도 모른다고 당당히 말씀드렸더니, 전공생들이 읽는 원서 말고 번역본을 보면 된다고 격려해주셨다. 그리하여 국문과 학생에겐 적잖이 아방가르드한 패션 감각과 민주적 ‘똘레랑스’를 보여주신 교수님 덕분에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을 한 학기 동안 (나만 한글로) 읽었다.

 

발자크의 고전 속 인물이 청년인 당신에게 건네는 말 

타인의 성공신화는 어쩌면, 부풀려진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을 바친 목표는 어쩌면, 당신이 꿈꿨던 삶이 아닐 수 있다고 

프랑스어는 못하지만, 불문학 전공자에게도 발자크의 문체는 꽤 난삽한 모양이다. 분량이 엄청난 데다 워낙 정신머리 없게 쓰여서 독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수업 듣는 학생들 모두가 머리를 싸쥐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구경하자니, 가벼운 마음으로 번역본을 읽는 내 처지가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마담 보바리」 한 작품을 5년간 쓰면서 수없이 고치고 또 고쳐 2000장에 달하는 육필 원고를 남겼던 “문체의 왕자” 플로베르는 “통속적이고 거친” 발자크의 소설들을 몹시 헐뜯었다. 그러나 발자크의 문체가 이랬던 데는 사정이 있다. 실제로 발자크는 수정이라는 걸 할 시간도 없이 초고 상태의 원고를 집에 찾아와 대기하고 있던 출판업자에게 그야말로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넘겼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환상」은 프랑스 혁명기에 큰돈을 벌어보려고 출판인쇄업에 뛰어들었다 쫄딱 망하는 바람에, 매일 16시간씩 글을 써야 했던 발자크의 자전적 경험이 절절하게 녹아 있는 작품이다. 소설에는 뤼시앙과 다비드라는 두 청년이 등장하는데, 대학교 3학년 때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뤼시앙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도니스처럼 황홀하게 생겼으니까, 만은 아니고, 그가 더 전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시골 출신이지만 타고난 재능과 빼어난 미모에서 오는 자신감으로 성공을 좇아 파리로 상경하는 청년은 발자크의 모든 소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순수하고 어리석으며 이기적인 뤼시앙은 18세기 세계 최고의 허영의 도시 파리에서 승리하기엔 모든 게 부족했다. 도덕성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는 비정함, 능란한 처세술, 시대의 흐름을 읽는 냉혈한의 안목, 하다못해 서열 낮은 작위 하나 없이, 그저 열망과 능력만으로 애쓰고 또 애쓰지만, 출세는 재능의 탁월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소설은 그가 얼마만큼 환상에 가까워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처절히 파괴되는지를 장장 700쪽에 걸쳐 묘사한다. 스물세 살의 나는 「잃어버린 환상」을 읽으면서 규칙 없는 싸움판 같은 세상에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모든 것이 쉽사리 바뀌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좌절감 같은 걸 느꼈더랬다.

요즘 「잃어버린 환상」을 다시 읽고 있다. 그랬더니 27년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다비드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뤼시앙의 학교 친구이자 ‘처남’인 다비드는 고향에서 아버지가 떠넘긴 구식 인쇄소를 운영하는데, “마호메트의 아내가 남편을 믿듯이” 자기 오빠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아내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뤼시앙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빚을 내가며 파리의 뤼시앙에게 생활비를 부쳐준다. 그런데 이 소박한 생활인이자 듬직한 가장인 다비드야말로 시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변덕스럽고 유약한 뤼시앙에게는 없는, 고난을 견뎌내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재료와 제작 공정의 특성상 매우 값비쌌기에 책이 귀족과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던 시대에 다비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인쇄술의 혁신과 질 좋고 저렴한 종이 개발에 몰두한다. 발자크가 묘사하는 다비드의 노고는 박물학적 가치가 있을 만큼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그것은 작가 자신의 참담한 실패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잃어버린 환상’의 부산물이다.

힘과 이득의 논리에 충실한 현실 앞에서 가냘픈 희망마저 무참히 깨져버릴 때, 우리는 환멸의 파도에 휩쓸리고 만다. 그러나 비록 부서질지언정 질주를 멈추지 않는 발자크의 인물들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필사의 생존자들 같다. 약하고 젊은 그들이 부디 살아남기를, 두 손 맞잡고 간절히 기원하며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졌다.

당신이 누구든 아직 청년이라면, 아무쪼록 다른 사람의 ‘성공신화’는 귀담아듣지 마시길. 그것은 가치가 부풀려진 환상일 가능성이 높으며, 설령 실현된다 하더라도 당신이 바라고 꿈꿨던 삶은 아마 아닐 거라고. 장차 출판, 언론, 비즈니스, 정치, 예술, 연예계에 투신하려는 청년이라면, 하여간 이 세계에서 무엇이든 되고자 하는 청년이라면, 「잃어버린 환상」을 읽으면서 그것이 과연 나의 생을 바치기에 충분한 목표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마도 발자크의 활달한 문장들은 당신의 마음을 더 뜨겁게 부채질할 테지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선택들의 목록을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수은 출판편집자

*본교 국어국문학과를 1995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학동네, 열림원, 민음사 외 다수의 출판사에서 20년간 문학편집자로 일하며 국내외 유수한 작가들의 책을 기획하고 출판했다. 지은 책으로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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