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술잔이 오고 가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자리였다. 한 친구가 던진 물음으로 인해 술자리의 분위기는 금세 차분해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쭈뼛거리며 머뭇거리기도 잠시, 곧이어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본인의 죽음은 두렵지 않다던 친구가 있는 반면,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삭제되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던 아이도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간 후,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짧은 담화는 결국 ‘세상을 떠나기 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주어진 현실을 충실하게 즐기자’는 다짐으로 귀결되며 종료됐다.

나는 죽음을 잘 알지 못한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여태 장례식장에 가 본 경험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어렸을 적엔 죽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영원한 무(無)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상상력이 뛰어난 탓에 자연재해, 좀비, 전쟁 등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과 부모님이 돌아가실 수 있다는 걱정으로 매일 밤 울기 다반사였다. 그렇게 죽음은 막연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죽고 싶다’, ‘너 죽을래?’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대학교에 합격하고 말겠단 일념 하에 공부에 매진하는 어린 학생들부터, 바쁜 일상에 치여가며 하루하루 출근하는 직장인들까지 말이다. 언제든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저울질을 하는 셈이다. 매일 습관처럼 툭툭 말을 내뱉어서 그런지, 어쩌면 ‘죽음’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가까이, 도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삶을 이어갈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은 오롯이 본인에게 달려있다는 일종의 우월의식이나 주인의식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죽음과 관련된 말을 생산해내고, 무비판적으로 흡수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상생활을 영위해가고 있는 요즘, 역설적이게도 우린 죽음과 거리가 멀어졌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 그전까지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최대한 알차고 가치 있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퍼진 지 오래다. 전염병과 같은 불가항력적 상황이 닥치자 그 양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듯하다. 본인은 죽음과 일체 관련이 없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자신과 죽음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무뎌졌다. 매일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하루에 사망자가 천 명 이상 늘어 누적 사망자 수만 2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루에만 20만 명이 넘게 급증하는 확진자 수는 말할 것도 없다. ‘사망자 수’라는 숫자들의 모음으로 치환된 사망자 현황을 지켜보며, 우리는 점차 무뎌진다.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가 더 적다며, 코로나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이 떠돈 적이 있다. 사망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들으며 놀라우리만치 침착한 내 자신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와버렸다. 죽음에 익숙해진 우리. 타인의 죽음을 내 각성제나 동기부여제로 여기기보단, 내 옆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모여 거대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죽음이 만연한 시점에서 지치거나 질리지 않게, 무뎌지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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