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 여성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성이 아이를 낳았다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소식이 제법 화제다. 특별히 이슈가 된 이유가 있다면, 소식의 주인공이 방송인이라는 데에도 있겠지만, 아마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스스로 엄마가 되기를 택해서’일 것이다.

이는 방송인 사유리씨의 이야기다. 그는 KBS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과거 방송에서 오래전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는 없어 ‘자발적 비혼모’라는 결정을 내렸다.

자발적 비혼모를 택했다는 소식이 왜 이슈인가에 대해 그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서’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동일시하는 일에 불과하다. 논의가 확장되지 못하고 그저 도돌이표처럼 도는 데에 그칠 뿐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이를 뜨거운 감자로 만든 건 엄마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결혼 제도가 선행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다.

그동안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을 ‘미혼모’라고 불러왔다. 아닐 미(未), 혼일할 혼(婚), 어머니 모(母).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엄마가 됐음을 뜻한다. 마치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 ‘정상적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보도들이 ‘자발적 비혼모’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이 돋보인다. 여성의 주체적 선택에 초점을 두고, 결혼 제도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의 댓글 창에서는 이런 선택을 두고 엄마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보는 의견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존재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래 생명의 탄생은 오롯이 위 세대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결과다. 따라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요구될 수는 있으나, 과도하게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선택의 주체에게 죄책감을 지우고, 결국 그를 비도덕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자발적 비혼모를 유달리 이기적이라고 하는 데에는 아빠의 부재로 인해 아이가 혼란 내지는 불행을 겪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한몫을 한다. 여기에도 소위 ‘정상 가정’에 대한 강박이 작용한다. 여성과 남성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형성한 가정만을 온전한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상’이라는 잣대를 답습하고, 이에 맞지 않는 형태는 불완전한 것으로 단정 짓는다. 물론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기에, 이에 대한 고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상 가정’이라는 틀이 개인의 행복과 정체화에 있어 하나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 하나의 축으로 정상을 판별해내는 일은, ‘정상’의 영역에 속하지 못한 존재들을 모두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비(非)정상이라는 말에는 문자 그대로 ‘정상’이 아닌 존재들에 대한 부정이 깔려있다. 하지만 관점을 ‘익숙함의 차이’로 바꿔보면 어떨까. 지금껏 ‘정상’이라는 기준에 길들여져 왔다면, ‘비정상’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은 그저 덜 익숙할 뿐이다. ‘익숙하지 않음’에는 적응이라는 돌파구가 있다. 모든 일의 처음이 그렇듯, 익숙함을 깨는 것은 어색하고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고 나오면 잠재돼있던 더 많은 가능성들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발적 비혼모가 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대한산부인과학회의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법적 부부만이 시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함을 깨는 행보에 반응하듯, 정계에서는 현행 제도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가정의 다양한 형태를 아우르는 사회적 논의에 대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익숙함을 깨고 나온 새로운 시도가 다시 익숙함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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