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원 융합콘텐츠학과 교수
한혜원 융합콘텐츠학과 교수

나에게 상담을 청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콘텐츠 기획자’ 혹은 ‘스토리텔러’를 꿈꾼다. 그들은 열정에 찬 눈빛으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저는 인터랙티브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까요?” “저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냥 게임을 많이 하다 보면 되는 걸까요?”

미래의 스토리텔러로부터 이런저런 질문을 받노라면 어느새 나까지 행복해진다. 그때마다 나는 꼭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좋은 책들을 꾸준히 읽으면서 자신만의 원형과 레퍼런스를 비축해 두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필자는 운 좋게도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한 선도적 연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다.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 디지털 게임 시나리오, 인공지능의 페르소나, 로봇 캐릭터, 스마트 보드게임, 에듀테인먼트 콘텐츠, 인디아티스트 콘텐츠 등 나열하고 보니 참으로 다양하다. 솔직히 낯설고 새로운 분야와 협업을 한다는 것이 늘 쉽진 않지만, 그나마 덜 겁을 먹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는 바로 내가 오랜 기간 국문학을 공부했으며 끊임없이 좋은 책을 선택하고 읽어왔다는 밑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학생이 고맙게도 나를 ‘성공한 덕후’라고 칭해준 적이 있다. 성공까지는 모르겠으나 덕후인 것을 전면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하루의 아침을 요일별 웹툰으로 열어야 신선하게 시작할 수 있고, 주말에는 넷플릭스(Netflix)와 왓챠(Watcha)의 신작 드라마를 섭렵해야 안심이 되며, 한 해에 나온 게임이란 게임은 일단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니 말이다. 

 

웹툰ㆍ넷플릭스 '덕후'의 오랜 '덕질', 독서

읽는 만큼 상상하고, 상상한 만큼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꾸준히 시간을 들여온 덕질이 있으니 다름 아닌 ‘독서’다. 일단 내 서가의 책은 크게 ‘소장용’과 ‘소비용’으로 구분된다.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쿠사마 야요이 삽화본, 비비안 웨스트 우드 삽화본 등 어디서든 우연히 한정판을 만나면 일단 그 책을 소유하고 고이 모셔둔다. 그런가 하면 책장 한편을 차지한 황금가지 출판사의 밀리언셀러 클럽은 언제든 거침없이 읽고 던질 수 있는 소비용이다. 소장용이든 소비용이든 나만의 책을 고를 때는 아무래도 모두의 영화나 드라마를 선택할 때보다 더욱 신중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책이 이야기를 담고 있겠지만, 실제로 양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는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경우 독서 편식이 심한 편이다. 

수업이나 연구를 위해서 곱씹어야 하는 이론서 외에는 주로 환상성에 기반을 둔 추리, SF, 호러, 판타지 등 이른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장르 문학, 즉 대중 문학을 즐겨 읽는다. 스티븐 킹을 통해 ‘공포’의 감정을 언어화하는 법을 배웠고, 필립 K. 딕을 통해서 근미래 가능 세계를 상상했으며, S.S. 반 다인과 아서 코난 도일을 통해서는 문제 해결형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러한 사심을 듬뿍 담아, 한때 동아일보에 <한혜원의 판타스틱 창고>를 연재하고,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중 <한혜원의 환상도서관>을 진행하면서 국내에는 낯선 장르 문학을 소개하던 시절도 있었다. 

사실 독서는 생활 습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밤 9시 이후에는 될 수 있으면 오롯이 독서를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학창 시절에는 책상 서랍 속에 소설책을 넣고 몰래 읽다가 들켜서 혼난 적이 아마도 백 번쯤 되리라. 학부와 대학원 시절에는 공강 때마다 중앙 도서관 800번대 서가를 헤맸다. 그 시절 나에게 도서관이란, 보르헤스의 말을 빌자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가능 세계였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본래 국문학도였는데 어떻게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자로 바뀐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바로 독서의 블랙홀로 빠지면서 자연스레 일어난 일이었다고 답해야 맞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디지털 매체와 스크린이 넘실대는 21세기이건만, 왜 굳이 종이를 넘겨 가며 글자를 읽는 수고를 감수하라고 권하는 것일까. 과연 미래의 로봇 캐릭터 기획자와 인터랙티브 드라마 작가가 역대 노벨상 수상작을 읽는다고 해서 콘텐츠를 만드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걸까. 

단언컨대 그렇다. 실제로 콘텐츠 기획과 창작의 현장에서 작가와 기획자들은 중요한 결전의 순간, 독서를 통해 다진 자신만의 원형과 레퍼런스를 제다이의 광선 검처럼 꺼내 든다. 책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매체 중 하나이며, 이는 지난 100년간 충분히 검증됐다. 서사학자 마리 로어 라이언(Marie-Laure Ryan)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바야흐로 ‘복수의 매체를 가로지르는 이야기 세계(Storyworlds across Media)’에서 살고 있다. 스토리월드의 하늘 아래에 완전한 새것이란 없다. 결국, 우리는 읽는 만큼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한 만큼 만들 수 있다.

한혜원 융합콘텐츠학과 교수

*본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현재 융합콘텐츠학과에서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랩(Creative Content Lab)을 맡고 있다. 게임학,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사용자 생성 콘텐츠 등 디지털 스토리텔링 분야의 전문 연구자이자 콘텐츠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앨리스 리턴즈-뉴미디어 콘텐츠에 나타난 여성 캐릭터 연구」, 「아이의 마음을 훔치는 스토리텔링 전략」,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 호모 나랜스」,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 「뱀파이어 연대기」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