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절부터, 나는 솔직한 것을 싫어했다.

솔직함은 날카롭게 다가왔고, 그것이 쥐고 있는 현실 혹은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알아도 애써 부정하며 나 좋을 대로 생각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로 포문을 열 때 나는 긴장했다. ‘(이제서야) 솔직히 말해보겠다’라는 표현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말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당신의 도덕적 부채감은 덜어주되, 내뱉어진 말들은 여전히 아프기만 했다. 어쩌면 관용 혹은 이해를 갈취하는 그 말 때문에 더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솔직함’에 악평하고 기피하며 내 마음을 보호했는데, 오히려 마음은 더욱 쇠약해져 갔다.

솔직한 것을 듣기 싫어하며 좋은 것만 골라 듣고 믿다 보니, 내가 하는 말들도 그렇게 돼 갔다. 투명하고 진솔한 것이 아니라 돌아가고 꽁꽁 싸매져 있었다. 언제나 ‘돌려 말하기’ 화법에 골몰해 있던 내가 언택트(untact)로 팀플 활동을 경험하게 되면서 이 모든 게 시작됐다.

온전히 텍스트로만 이뤄진 소통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정리된 텍스트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오해 없는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타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각해야 하는 것이 결여돼 있었다. 사람들이 보낸 텍스트에는 그의 목소리와 그 순간의 톤, 어조, 짓는 표정과 대화 사이사이의 쉼 소리 같은 것들이 누락돼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절실했다.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무엇이 제거된 채 진행되는 텍스트 소통은 한 층 더 발달된 ‘돌려 말하기 전략’을 낳았다.

돌려 말하는 것과, 돌려 말해진 말들을 듣는 것은 굉장히 피로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될 요청 사항을 앞뒤로 궁금하지 않은 상대방의 안부와, 궁금해하지 않을 나의 사연들을 붙여가며 핵심을 꽁꽁 보호했다. 한 가지의 핵심이 갖가지의 미사여구로 둘러싸여 갔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본질이 훼손되듯이, 과잉보호는 지키고자 했던 핵심을 오히려 부쉈다. 그저 넘치는 활자들에 진이 빠질 뿐이었다.

게다가 돌려 말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 그것을 부드럽게 요구하기 위해 ‘돌려 말하기’를 선택했는데, 종래에는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소통하는 말들을 꾸미면 꾸밀수록 원래의 제 모습과 기능을 상실해 갔다.

그래서 솔직함을 다시 바라봤다. 나의 의견과 나 자신을 포장하고 보호해주던 말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솔직해지자.” 5줄로 조심스럽게 말하던 것을 2줄로 줄이고 추측과 감정을 제했다. 이리저리 피하며 이야기하다 나중에 ‘솔직히 말씀드리면’과 같은 이기심을 저지르기 싫었다. 간결하게 핵심만을 말하는 것이 소통에 있어서 필요한 배려, 나와 모두를 위한 보살핌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솔직함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솔직함이 싫어 돌려 말했는데, 결국 솔직함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됐다.

딱딱한 종결어와 단호해 보이는 온점에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젠 튼튼한 종결어와 쿨한 온점을 믿는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들과, 끝없이 늘어지는 반점들 없이 전송한다. 이미 날아가 버린 글자들을 보며 부디 내 의도를 오해하지 않길, 내 마음을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 정 없이 용건만 전달해도 나는 참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짧은 문장 안에는 더 긴 고민의 시간이 담겨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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