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른한 기분으로 실시간 수업을 듣던 내 정신이 바짝 들었다. 12월 첫째 주까지 기말 레포트를 제출하기 전, 글의 주제나 구조에 대해 전체 수강생과 일대일로 면담할 예정이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면담 시작은 당장 2주 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망했다’였다. 12월이면 한참 뒤라고 생각했기에, 무슨 주제로 레포트를 써야 할지 고민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내 표정이 너무 심각했는지, 혹은 내 생각을 읽으셨는지, 교수님께서는 당신도 해야 할 일을 미리 시작하는 편은 아니라며 웃으셨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과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틈틈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생각을 했으면 해요.”

교수님은 이어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허약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허약하지 않은 사람. 나는 허약하지 않은 사람인가? 수업 전 학생들에게 가볍게 건넨 말씀은 내게 큰 메아리가 돼 돌아왔다. 부끄럽게도, 사실 나는 매우 허약해져 있었다.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며 나의 미루는 습관은 더욱 심해졌다. 시험 기간이 돼서야 부랴부랴 밀린 녹화 강의를 듣기 일쑤였고, 출석 체크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공부를 미룸으로써 생겨난 시간에는 주로 침대에 누워 SNS에 접속했다. 학교에 다닐 때보다 나를 통제하는 상황이 줄어들었기에, ‘급한 일’이 아니면 일을 최대한 미뤘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생각’하는 것도 미루게 된다는 점이었다.

평소의 나는, 주어진 텍스트 너머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즐거웠다. 때문에 소설 한 편을 읽은 뒤에는 꼭 비평문이나 해설을 찾아 읽었다. 미디어 매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관람한 뒤에는 개인의 생각이나 해석을 작성한 여러 블로그 글을 읽으며 타인과 생각을 교류하곤 했다.

그러나 미루는 습관이 심해지며 나의 즐거움은 예전만큼 깊게 이어지지 못했다. 단순한 ‘감상’에만 머물렀을 뿐, ‘분석’하고 ‘사유’하는 데에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험 기간에 들어서며 학보가 잠시 휴간했을 때 특히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잠시 쉬어간다는 명분으로 깊은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단순하고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시간을 할애했다.

며칠 전 하반기 발행이 시작되고, 편집국에 있던 동기 기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들의 대화는 가벼운 주제에서 시작해 학교 사안, 그리고 얼마 전에 본 뉴스로까지 퍼져나간다. 그날의 주제는 얼마 뒤 있을 총장선거였다. 이후 서로가 취재하던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말을 꺼냈고, 이렇게 취재한 기사를 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방법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한마디씩 말을 얹다 보니 분위기는 진지해졌고, 가볍게 시작한 대화지만 풍부한 논의가 오고갔다.

그들과 대화하다 불현듯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학보를 쉬었던 동안의 내 모습과, 하반기 발행을 시작한 내 모습에는 미묘하지만 차이가 있었다. 사회 문제(비록 학내 사안이지만)에 내 목소리를 작지만 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사회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보인다는 것. 그렇게 작은 부분까지 볼 수 있게 되면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자는 나만의 약속은 학보 기자로서의 작은 다짐도 되지만, 전반적인 삶에 대한 나와의 약속이라고도 느낀다. 허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단단한 사람이 돼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도와준 데에는 학보사 활동이 한몫을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준 동기 기자들에게는 고마움을, 허약했던 과거의 내게는 반성의 눈길을,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나와 함께 깊이 사유하게 될 독자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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