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수 선임기자 KBS 보도국 뉴스제작부 AD 인턴
강지수 선임기자 
KBS 보도국 뉴스제작부 AD 인턴

오전10시. 눈을 뜨고 한껏 고요한 집안 공기를 들이켠다. 가벼운 운동과 점심식사 후엔 나갈 채비를 한다. 오후1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 직장으로 향한다. 입사 4개월 차 방송사 보도국 조연출의 하루는 남들보다 반 바퀴쯤 느리게 시작한다.

“보도국이면 집에도 못 가겠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뉴스거리가 끊이지 않을 보도국에서의 삶은 치열하다 못해 피폐하리라 예상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편집국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출근 시간인 오후2시부터 메인 뉴스가 임박한 저녁 무렵까진 놀랍도록 고요하다. 각 취재부서 팀장, 부장들과 통화하는 편집국 기자들의 목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해외 특파원을 준비하는 기자들은 어학 공부에 몰두하기도 하고, 몇몇은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다. 이곳 분위기에 약간은 적응한 나 역시 책을 한 권 집어 든다. 요즘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산문집을 읽고 있다.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이곳 언론사에서 일하는 첫날,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편집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편집국은 고성이 오가고, 취재기자를 불러 혼쭐을 내기도 하며, 방송 사고가 나는 날엔 부서 전체가 부장에게 깨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매일 쳇바퀴처럼 시시하게 굴러가는 건 결코 아니다. 지난여름 한반도를 할퀴고 간 태풍들이나 유례없는 긴 장마에 재난방송주관방송사 뉴스룸은 특보체제에 돌입한다. 예측할 수 없는 방송 사고가 터져 여럿 곤란한 적도 있었으며, 새벽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특보에 조연출들은 발바닥에 땀이 마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깊은 밤, 지친 몸을 택시에 기대고 퇴근하는 길엔 ‘제발 내일은 비 좀 그쳐라’ 속으로 간절히 빌곤 했다. 돌아보면 그렇게 자연재해가 미웠던 적도 없었다.

여름이 지나고, 특보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가을을 맞았다. 오후2시 출근 후엔 어김없이 책을 꺼내 든다. 혹자는 내가 독서광이라 예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그간 나는 과제 목적이 아닌 독서는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책 읽을 시간에 잠을 한숨 더 자고 싶었던 바쁜 학부생이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특히 작년엔 과 학생회장직을 맡으며 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학보사 기자로도 일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러다 운이 좋게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지며 지난 6월 종강을 2주 앞두고 조연출 생활을 시작했다. 7학기를 수료하고 단 한 학기를 보험처럼 남겨두고선 이화를 잠깐 떠나왔다.

취재부서에서 인턴 생활을 할 줄 알았지만, 어쩌다 보니 시니어 기자들만 가득한 편집국에서 언론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취재현장에서 취재기자들의 보조로 뛰는 것이 아니라, 제작된 방송 리포트를 살피고, 시청자에게 어떻게 하면 더 잘 전달될지, 뉴스 안에 저널리즘 원칙에 어긋나는 시각적 요소는 없는지 고민하는 입장이 돼 있어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긴 하다. 그럼에도 취재기자를 꿈꾸는 나에게 이곳 생활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지면을 만들던 학보 취재기자에게 방송뉴스를 가르치기도 했고, 무수히 쏟아지는 사건사고 중 어떤 게 기사화돼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지도 깨우쳤다.

이런 배움 외에도 영감을 주는 인물과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특히 선배 기자들은 모두 ‘다독(多讀)’의 중요성을 매번 일깨워줬다. “지수야, 일단 책을 많이 읽어. 그게 다 자산이야.” 그 후로 대통령의 ‘한국형 뉴딜’ 정책 발표에 관한 리포트를 접한 날엔 「글로벌 그린 뉴딜」을, 요즘 2030세대의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리포트로 접한 날엔 「90년생이 온다」를 곧바로 빌려 읽었다. 사내 도서관이 독서의 참맛을 일깨워주는데 한몫을 했다.

사실 그간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나에게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노동행위로 다가왔다. 또 책보다는 신문 공부가 더욱 유익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책은 그저 이론가들의 논쟁장에 불과하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전 세계가 앞다퉈 솔루션을 제시하는 지금, 대한민국 대표 석학들이 나눈 대담을 기록한 「코로나 사피엔스」는 내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쳤다. 6월에 발간된 책 속 석학들의 말이 최근에서야 리포트에서 각국 정상이나 글로벌 기업 수장들의 입에서 아주 유사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책보다 뉴스공부가 더 낫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신문사 취재 인턴 기자가 아닌 방송사 편집국 조연출로 일하는 1년여의 순간은 어쩌면 신이 나에게 책을 읽을 기회를 준 거란 생각이 든다. ‘자네는 책도 안 읽고 바쁘게 살아왔으니, 약간 쉬며 다독해보게나’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다. 그 말을 받들어 이곳에 몸담을 향후 몇 개월 나는 다독해보기로 다짐했다.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사자성어를 참 좋아한다. 진기한 물건은 사 둘만 한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투자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가 가장 먼저 기회를 잡는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출근도, 오늘 읽은 책의 구절도 몇 년 후의 내가 좋은 기회를 잡는 데 소중한 자산이 돼 주겠지. 한껏 기대에 차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힘차게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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