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붙는 짧은 흰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 문서를 든 손에는 길게 네일 아트(nail art)를 했고, 빨간색 하트가 그려진 헤어 캡을 쓰고 있다. 여자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떤 사람이 떠오르는가. 이 여성을 간호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이돌 블랙핑크(BLACKPINK)의 신곡 ‘Lovesick Girls’의 뮤직비디오 속 해당 장면은 ‘간호사 코스튬(costume)’으로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모자에는 적십자 대신 빨간색 하트가, 진료 기록지를 적는 손에는 하얀색의 긴 네일 아트를 한 영상 속 간호사. 단정하게 머리망을 하고, 생사와 일분일초를 다투며 일하는 일반적인 간호사의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5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간호사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멈추라”는 입장문을 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멤버 1인이 입은 간호사 복장은 현재 간호사 복장과 심각하게 동떨어져 있다”며 “이는 ‘코스튬’이라는 변명 아래 기존의 전형적인 성적 코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6일 대한간호협회도 글로벌 가수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조하며 YG엔터테인먼트에 간호사 성적 대상화 재시정을 촉구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YG엔터테인먼트는 “특정한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왜곡된 시선이 쏟아지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며 “음악을 표현한 예술로 봐달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7일, 이내 논란이 된 해당 장면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여론은 ‘표현의 자유’와 ‘성적 대상화’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팽배하게 갈렸다. 간호사를 부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이 “예전에도 그랬는데 뭐가 문제냐”, “이런 것까지 금지하냐”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간호사 코스튬은 결코 표현의 자유도 예술도 아니다. 간호사라는 직업군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결여된 명백한 성적 대상화이며,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차별적 표현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미디어가 자본과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성을 상품화해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5월12일 ‘국제 간호사의 날’, 나순자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간호사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호소했다. 병원 노동자 중에서 간호사는 가장 많이 성폭력에 노출되고 있었다. 나 위원장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간호사들의 79%가 폭언 피해를, 그중 14.5%는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 단순히 표현의 자유라고 치부하기엔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현실 세계는 미디어 속 세상과 끊임없이 공명한다. 미디어는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또다시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변한다.

미디어 속 간호사의 이미지가 현실에 투영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곧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특히 아이돌을 선망하는 청소년들이 잘못된 성 관념과 직업관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미디어는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 만들어야 한다.

이번 논란은 대한민국의 성 인지 감수성이 얼마나 낮은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생활에 만연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하지 못하는 건 물론, 무지함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며 ‘원래 그래 왔다’고 두둔했다.

원래 그랬으니 그래도 당연하다는 것인가. 이전에 그랬다면 지금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원래, 관례, 전통이라는 말은 타당한 논리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문제를 회피하려는 변명이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구시대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시대는 변했고,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던 여성 혐오, 가부장제 등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잘못된 인식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연대하고 행동하고 있다.

변화는 당연시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지나쳤던 수많은 당연함을 다시 한번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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