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명. ‘코로나19’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지난 1학기 본교를 떠나 해외로 파견 예정이었던 인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코로나19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고, 본지는 지난 학기 이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코로나19 이후 두 번째 학기가 시작하는 현재, 본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파견 일정을 모두 소화한 학생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코로나19 속 프랑스, 독일과 싱가포르에서의 파견생활은 어땠을까.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이겨냈던 ‘쿼런틴 라이프’

김유진씨가 파견교 행사 이후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다. 제공=김유진씨
김유진씨가 파견교 행사 이후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다. 제공=김유진씨

“통행증 챙겼고. 아 신분증!”

김유진(체육·18)씨는 프랑스 릴 카톨릭 대학(Lille Catholic University)에서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1학기 파견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그렇지만 김씨가 계획했던 유럽 여행은 물거품이 됐다. 파견 기간 중인 3월17일부터 5월11일까지 프랑스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동제한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동을 위해서는 이동 증명서(통행증, Attestation de déplacement)가 있어야 했다. 현지 경찰들은 외출 사유를 적은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고 외출한 사람들에게 한화로 약 18만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동제한령으로 인해 필수 식료품 구매, 병원 방문 등을 제외하고는 이동이 불가능했다. 김씨는 한 번 마트에 갈 때 일주일 치 식량을 미리 사둬야만 했다. 물론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인원수 제한 때문에 직원들이 한 팀이 나가야 한 팀을 들여보냈다. 그는 마트에 들어가기 위해 약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의지했던 친구들이 귀국을 결정하고 텅 빈 기숙사를 보는 것 역시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김씨는 기숙사에 남은 ‘최후의 한국인’이었다. 김씨는 “코로나19로 인해 인종차별을 겪은 아시아인 친구들이 많았다”며 “아는 언니는 심지어 아시안 마트를 가다가 ‘코로나’라고 외치며 침 뱉는 사람을 만났다”고 토로했다.

김씨가 파견을 지속한 이유는 어쩌면 다시 없을 위기에 홀로 대처해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는 “해외에서 이방인으로서 난생처음 마주하는 코로나19라는 위기상황에 대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프랑스 대통령의 담화와 뉴스, 한국 대사관 공지사항 등을 챙겨 보며 팬데믹(pandemic,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 상황을 타국에서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교환 생활은 김씨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주만 시행하기로 했던 이동제한령이 5월까지 연장돼 밖은 못 나갔지만, 좋은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친구들과 기숙사 정원에 매일 모였다. 김씨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각자 해온 요리를 함께 나눠 먹으며 대화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기 하루 전에는 그동안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커리를 인도 친구들이 해줬다”고 전했다.

끝으로 그는 “이번 교환 생활을 통해 얻은 교훈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기 나름이고, 결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망한 파견’ 아닌 ‘여유로운 파견 생활’

김지우씨가 베를린 여행 중 직접 찍은 바이덴다머 다리(Weidendammer bridge). 제공=김지우씨
김지우씨가 베를린 여행 중 직접 찍은 바이덴다머 다리(Weidendammer bridge). 제공=김지우씨

김지우(철학·17)씨에게 독일 파견은 자신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김씨는 휴학 없이 6학기를 보냈고 학업에 지쳐 있었다. 그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3월부터 8월 말까지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 대학교방문 학생으로 파견을 결정했다.

기대도 잠시, 코로나19로 파견교 프로그램, 파티, 페스티벌 등은 모두 취소됐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6개월간 학교 캠퍼스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김씨의 친구들은 김씨가 시기가 안 좋을 때 갔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김씨는 “시기가 특별했던 만큼 새로운 경험도 하고, 많이 배우고 돌아온 것 같다”고 전했다.

3월부터 시행된 접촉 제한조치로 인해 독일은 바(bar)는 물론이고 카페나 식당 모두 문을 닫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김씨는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책을 읽었다. 기대했던 파티는 없었지만 김씨는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소수의 친구를 사귀었다.

파견 일정 후반부인 6월에는 독일 베를린(Berlin)으로 여행을 갔다. 그는 “다른 학기에 왔던 교환학생들처럼 다른 국가로 여행을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목적지였다”고 답했다. 김씨는 흔히들 하는 여행처럼 ‘베를린에서 꼭 가봐야 할 곳’들을 가지는 않았다. 그는 베를린에서 사는 사람처럼 베를린에서의 평범한 일상들을 즐기고자 했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정처 없이 걸었어요. 그러다 보이는 서점에 들어가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테라스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말없이 있기도 했어요. 한국이었다면 바쁜 일상에 짬을 내어 간 거니까 어딘가를 가고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의 베를린 여행은 독일의 완화된 ‘접촉 제한조치’ 아래에서 이뤄졌다. 마스크를 반드시 써야 했고, 사람 사이 1.5m 거리 두기를 지켜야 했다. 간격 유지를 위해 실내로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김씨는 “일상생활 하기에 아주 어렵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베를린에서 ‘시위가 있는 곳’을 피해 다녔다. 당시 베를린 내에서는 반(反) 마스크 시위, 봉쇄령에 반발해 일어난 시위 등이 있었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동양인 대상 혐오범죄가 많다는 소문을 들어 사람이 많이 모여 시위하는 곳이 있다면 피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파견 생활 동안 많이 들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심각해졌다기보다는 원래 인종차별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며 “동양인 대상 혐오범죄를 크게 염려하지 말고 편히 지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전했다.

 

본교를 떠나도 이화인들과 함께해서 다행이었던 파견 생활

독일 슈테델 미술관(Staedel Museum)에서 이주연씨가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제공=이주연씨
독일 슈테델 미술관(Staedel Museum)에서 이주연씨가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제공=이주연씨

독일 헤센주에 위치한 괴테대학교(Goethe University Frankfurt)로 파견 간 이주연(휴먼바이오·18)씨는 이화인들과 함께였기에 해외에서 코로나19 시기를 견딜 수 있었다.

이씨는 3월부터 8월까지 독일에서 수업을 들을 예정이었다. 독일의 정취도 느낄 새 없이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강의는 3일 만에 온라인으로 변경됐다. 설상가상으로 현지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프로그램들은 모두 취소됐다. 그는 “며칠간은 정말 아는 사람이 현지에 한 명도 없어 외로웠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던 중 이씨는 친구를 통해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로 파견 간 이화인들끼리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카톡방(단톡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생활하면서 궁금한 점이나 힘든 일이 생길 때 벗들이라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반대로 나 역시 단톡방 내 다른 벗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단톡방 내 이화인들은 서로를 도우며 독일 생활을 했다. 이씨는 “3월에는 휴지가 품절돼 2주 넘게 휴지를 구하지 못했다”며 “당시에 휴지를 미리 구매한 벗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할 수 있었다”고 했다.

3월과 4월에는 독일의 엄격한 접촉 제한조치로 인해 식료품을 사는 것을 제외하고 외출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당시 이씨는 무기력해지지 않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벗들과 돌아가면서 각자 기숙사에 서로를 초대했어요. 저녁을 함께 먹고 독일어 공부도 했어요. 이틀에 한 번씩 각자 주제를 정해 세계사를 공부했고, 그 내용을 서로 공유했죠.”

이씨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표현주의와 같은 세계 미술사 흐름에 대해 조사했다. 그는 “같이 공부를 해나가면서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완벽하게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 보람찼다”고 말했다.

규제가 완화되자 이씨는 기차를 타고 가까운 나라들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는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좋아하는 작가인 에드 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3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전시회를 다녀온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함께 공부했던 이화인 2명과는 독일 슈테델 미술관(Staedel Museum)에서 그동안 했던 공부를 토대로 미술 작품을 감상했다. 그는 “서양미술에서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 등의 자세를 한 여성을 그림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누드화를 볼 때 집중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친구들이 옆에 있어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K-방역 아닌 S-방역 체험하기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기숙사 내 편의시설에 착석금지 테이프가 붙여진 모습. 제공=김연주씨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기숙사 내 편의시설에 착석금지 테이프가 붙여진 모습. 제공=김연주씨

‘싱가포르 정부의 신속하고 공격적인 대응은 코로나19의 초기 발병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지난 3월17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같은 날 한국은 확진자 수가 8320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김연주(사회·18)씨는 1월부터 5월까지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로 파견을 다녀왔다. 김씨 역시 싱가포르에 대해 “방역이 매우 철저했다”며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는 대기줄이 있는 모든 장소에 1m씩 테이프로 간격을 표시해뒀어요. 이 생활이 익숙해져 한국 공항에서 1m 간격을 둬 줄을 섰는데, 직원이 앞으로 당겨 서달라고 부탁해 당황했죠.”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권고의 형태로 운영되는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등이 싱가포르에서는 모두 벌금 적용대상이다. 김씨는 “벌금이라는 강제성 아래 진행되다 보니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경직돼 있었다”고 전했다.

4월에는 공공장소에서의 모임을 법으로 금지해 가족 간의 만남도 제한됐다. 김씨는 “제재가 심해지자 파견을 중단하고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이곳에 남는 게 맞는 것인지 많이 고민했다”며 “돌이켜 생각해보니 고민하느라 보낸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답했다.

하지만 방역 모범국에서의 파견 생활이라고 순탄치는 않았다. 김씨는 살던 기숙사가 자가 격리 시설로 지정돼 24시간 이내에 방을 비워야 했다. 파견교 측에서 다른 기숙사를 제공해줬지만 화장실, 주방 등 시설이 오랫동안 방치돼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김씨는 급하게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집 계약을 싱가포르에서 해야만 했다. 그는 “부동산 매물을 어디서 찾아봐야 하는지조차 몰라 막막했다”며 “영어로 된 열 장 분량의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처리하는 것 역시 힘들었다”고 했다.

현지 한국인 유학생들의 추천으로 한인 커뮤니티에서 매물들을 보기도 했지만 여러 조건이 김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수업도 뒷전으로 한 채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결국 싱가포르 내 집을 구하는 앱인 ‘Carousell’을 통해 적당한 가격에 집을 구했다.

이사한 후에도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와이파이 설치부터 전기세 관리까지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해내고 나니 한층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며 “해외에서 집까지 계약해보니 이젠 정말 못할 게 없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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