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한 내 삶의 큰 변화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 되면 TV로 유튜브 스트리밍을 켠다. 익숙한 교회의 모습이 보이고, 스피커에서 찬양과 말씀이 들린다. TV와 스피커는 예배의 현장감을 가로막는다. 편안한 공간에서 예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설교 시간에 배가 고파지면 과일을 꺼내 깎아 먹는다. 강아지가 거실로 나와 애교를 부리면 나의 시선은 강아지로 옮겨 간다. 예배가 끝나면 마음을 쏟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죄책감을 느낀다. 예배의 방식이 바뀌니 나의 신앙마저 변한 것 같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때는 예배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영상을 “시청”만 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됐다. 성경에 명시적으로 온라인 예배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이 방식이 성경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저 오프라인 예배로 돌아오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는 장기화됐고, 점점 기대보다 온라인 예배에 대해 고찰을 하게 됐다.

최근 한 교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집회를 강행했다. 코로나에 따른 예배 제한을 종교에 대한 국가의 간섭으로 봐야 하는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신앙은 자유로운 행위이므로 아무도 강제할 수 없다”는 명제를 내세웠다.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코로나로 인한 교회 모임 제한을 신앙에 대한 강제이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심층적으로 살펴본다면 위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 개인은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법질서를 따라야 한다.”라는 루터의 주장을 고려하면, 루터는 오히려 국가의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신앙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코로나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면 바이러스가 전염될 확률이 높아지고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할 것이다. 이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사회구성원들에게 혼란을 주며,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경적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예배를 아예 금지한 것이 아니며 ‘온라인 예배’라는 대안이 있다. 따라서 예상하지 못한 전염병의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는 신앙도 지키고 사회 질서를 지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성경을 보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0)라는 부분이 있다. 이는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제한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예배할 때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함을 말한다. 정해진 공간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고정적인 생각은 제한을 두는 것으로 예배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라인을 통해 삶의 공간에서 예배하는 것이 본질에 더 부합할 수 있다. 예배당은 예배를 위한 수단일 뿐이며, 수단이 예배라는 목적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 어떠한 것에 대한 변화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그 두려움을 깨고 다시 보면 더 좋은 길임을 안다. 온라인으로의 전환은 큰 변화이다. 덕분에 예배의 본질과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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