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비서학·05년졸) 작가·칼럼니스트
최지은(비서학·05년졸) 작가·칼럼니스트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가훈이 없는 우리 집에서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부모님은 나와 언니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 번도 아쉬움을 드러낸 적 없지만, 여자도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만큼은 확고한 분들이셨다. 입학 원서를 넣을 때 별 망설임 없이 부모님 뜻에 따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IMF를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취업 문은 좁았지만, 비서학과(현 국제사무학과)만큼은 100% 취업이 보장된다는 얘기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두 살 위의 언니가 이미 비서학과에 잘 다니고 있으니 걱정할 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지긋지긋한 입시 공부를 마쳤으니 대학에 가면 놀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졸업만 하면 번듯한 직장이 나를 기다릴 거라는 환상을 품고 나는 경영학부에 입학했다.

왜일까. 원하던 이화에 입학했는데도 학교생활은 어색하고 팍팍하기만 했다. 전공 수업에서도 교양 수업에서도 친구를 하나도 사귀지 못했다. 다른 동기들이 어떻게 스스럼없이 가까워지고 같이 밥을 먹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무 살 때의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남들이 나의 특별함을 알아보고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소심한 아이였다. 그러나 금발 머리에 포댓자루 같은 힙합 바지로 무장하고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나에게 선뜻 말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가수 장우혁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노트를 들고 다닌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착실히 ‘아싸’의 길을 걷던 내가 2학년이 되며 전공을 결정할 때 경영학과를 생각해 보지도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팀 프로젝트 수업이 많다고 해서였다.

 

49명 중 49등으로 졸업…그래도 인생 안 망해

20대 중요한 과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그러나 무언가를 원해서가 아니라 피하려고 선택한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비서학과 수업에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에게 공부는 재미없는 것이겠지만, 나처럼 관심 없는 주제에 5분도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은 재앙이었다. 나는 애꿎은 부모님을 원망하며 우울감에 빠졌다. 성적은 언제나 엉망이었고, 처음엔 출석 점수라도 챙기려 애썼지만 그 노력마저 곧 시들해졌다. C+ 받은 수업을 재수강해서 C를 받은 일도 있었다. 어학연수까지 다녀왔지만 토익 점수는… 비밀로 해두자. 한 교수님은 기초적인 전공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내가 답답한 듯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라고 묻기도 하셨다. 나는 그냥, 모든 게 얼른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몇 달 뒤, 모의 면접을 앞둔 대기실에서 도망쳤다. ‘귀사에 입사하고자 하는 이유’가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도피가 더 있었다. 그리고 두 달간의 공무원 시험 준비 끝에 교재비와 학원비만 버리고 이 길도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비서직에 맞는 사람일까? 매일 정장 입고 출근하는 직장이 나에게 맞을까? 내가 잘하는 일은 무엇이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뭘 할 때 재미를 느끼는 사람일까?

‘쓸모 있는 사람’, 남들 보기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나라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엑셀과 회계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글쓰기는 그만큼 어렵거나 싫지 않았다. 성적표가 C로 가득했지만, 국어국문학과 김미현 교수님의 ‘명작명문 읽기와 쓰기’ 에서만큼은 A를 받았다. 조용히 틀어박힐 곳이 필요해 찾아간 교지 편집위원회에서는 모난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과 친구가 없는 대신 이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아이돌 ‘덕질’을 하며 새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부모님이 늘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씀하셨던 그런 것들이 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간략히 얘기하자면, 나는 4학년 여름방학 때 방송작가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2학기에 취업했다. 물론 꿈과 현실의 거리는 멀어서, 비정규직 사회 초년생 여성으로서의 쓴맛을 다 본 뒤 일을 그만뒀다. 재취업을 하려니 어디에도 내밀 수 없는 성적과 토익 점수가 발목을 잡았다. 학부 때 대책 없이 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다가, 창간 초기의 혼란을 틈타 한 대중문화 웹진의 기자가 되었다. 무턱대고 뛰어든 세계는 안정과 거리가 멀었지만, 누군가는 쓸모없다고 여길지 모르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쓰는 것이 내 목표이자 즐거움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성과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 세상에 쓸모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다.

3년쯤 전, 졸업증명서가 필요해 학교에 갔다가 문득 궁금해져 석차가 들어간 성적증명서를 뽑아본 적이 있다. 49/49, 처음에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몇 초간 더 들여다보고 나서야 내가 49명 중 49등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 과에서 꼴찌를 할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인데, 아예 몰랐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동문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꼴찌로 졸업해도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졸업하고 나면 성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잊지는 말자.) 20대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해 알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화에서 헤매며 보낸 시간이 그 후의 나를 만든 것처럼.

최지은 작가·칼럼니스트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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