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와 가장 부러운 사람은 집밥 먹으며 학교 다니는 친구다. 통학하는 고충을 몰라서 그런가, 일단 본가가 수도권이면 부럽다는 말부터 나온다. 내 본가는 경상남도 양산. 서울에 온 지는 이제 막 3년 다 돼간다. 아직은 서울살이에 한보단 로망이 많은 초보 상경러지만, 기숙사부터 원룸을 전전한 지난 몇 년은 다사다난했다.

내 첫 서울 보금자리는 학교 기숙사 E-HOUSE. 이화의 자랑인 신축 기숙사다. 얼핏 보면 고급 리조트 같은 외형에 정독실, 학식당, 체력단련실까지 갖췄다. E-HOUSE 10인 유닛에 살며 가족만큼 가까운 친구 9명도 얻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기간이 딱 1년뿐이란 것만 제외하면 E-HOUSE는 내게 완벽한 거주지였다.

좋은 기숙사에 살면서도 마음 한쪽은 늘 불안했다. 당장 내년부터 어디서 살아야 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비싼 학비와 생활비에 자취는 꿈도 꾼 적 없다. 학교 앞 방을 구해준다는 부모님 말씀에도 늘 으름장을 놨다. ‘난 절대 자취 안 해. 4번째에 추가 합격하는 한이 있어도 기숙사 들어갈 테야.’ 결과는 4전 4패. 그 후 온갖 학사란 학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역시나 내가 들어갈 곳은 없었다. 그쯤 되니 2학년 개강을 앞둔 2월 말, 하숙방과 쉐어하우스를 구하기도 늦은 시기였다.

휴학까지 생각하던 찰나, 지원한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던 곳에서 입주 안내 연락이 왔다. 서대문구 소재 대학생 임대주택. 월세 10만 원. 버스로 10분이면 정문 도착.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까. ‘와 감사합니다. 매일 절하면서 살게요.’ 그렇게 월세 10만 원짜리 원룸은 내 두 번째 보금자리가 됐다.

기쁨도 잠시 그 이후 집은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곳’이 됐다. 6평 남짓한 원룸에 룸메이트와 둘이 사니 그럴 수밖에. 주방과 화장실까지 제외하면 내 공간은 넓어봤자 2평이다. 학교 기숙사처럼 학식당도, 정독실도 없다. 덕분에 음식은 배달 아니면 편의점, 과제 많은 날은 룸메이트를 피해 중앙도서관이나 24시간 카페에서 밤을 새웠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수요일 학보사 마감날이었다. 수요일은 모든 학보사 기자가 기본 새벽 3-4시까지 기사를 쓰고 고치며 마감한다. 원래라면 ECC 학보사 사무실에서 취재기자들과 모여 기사를 쓸텐데, 코로나19로 재택근무 중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학교는 문을 닫고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 후에는 카페에 있기도 힘든 상황이 됐다.

룸메이트와 약속한 소등시간은 밤 12시. 학보사 일정상 완고까지 한참 남은 시간이다. 그렇다고 밤새 노트북 타자 소리로 룸메이트를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향한 곳은 비상계단. 방 와이파이도 잡히고, 나름 의자처럼 앉을 자리가 있으니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끔 창밖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와 모기만 빼면 말이다.

모기에 뜯긴 무릎을 벅벅 긁으며 4시간을 꼬박 비상계단에 앉아 마감했다. 가끔 계단을 내려가는 입주생이 나를 발견하고 움찔할 때의 민망함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마감이 끝난 새벽 4시, 자리에서 일어나니 엉덩이와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없다며 난리인 노트북 화면을 덮고 방에 들어갔다. 잠든 룸메이트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에 누웠다. 좁은 천장을 바라보자 진이 빠졌다.

서울 상경 3년 차, 별안간 ‘현타’(현실자각타임)를 느꼈다. 감각이 돌아오는 건지 찌릿한 엉덩이보다 더 찌릿한 건 마음이었다. 좀 전까지 계단에 쪼그려 앉아있던 초라한 내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이 순간도 나중엔 청춘이라 기억될까. 그렇게 떠올리는 날이면 내게도 발 뻗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아, 그전에 취업은 했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잠이 들었다.

‘대게 먹으러 기장 가자. 집에 와라.’

다음날. 눈뜨자마자 와있는 엄마 문자에 곧장 양산행 표를 끊었다. 덕분에 지금은 남동생 공부방에서 편히 마감하고 있다. 새벽 3시. 오늘도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방 한 칸에서 잠들었을 모든 상경러들을 응원한다. 우리가 잠들어있는 공간은 좁지만, 가능성은 누구보다 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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