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숙(특교·94년졸) 중앙기독초 특수교사
송명숙(특교·94년졸) 중앙기독초 특수교사

주말 저녁 전화벨이 울린다.

“쌤! 제주도 가요. 아이스크림 먹어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올해 스무 살이 된 주영이다. 초등 6학년 때 갔던 제주도 졸업여행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며 잠도 자고 즐겁게 놀았던 그 일이 주영이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한순간이었나 보다. 7년 전 일인데도 며칠 전에 경험한 일을 말하듯 목소리가 들떠있다. 

주영이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어 특수교사인 나의 지원을 받으며 일반학급에서 공부했다. 말이 어눌하고 느리지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재미있는 동작이나 말을 흉내 내기도 잘했다. 친구들과 장난치며 웃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 집에 와요. 하룻밤 같이 자요.”

주영이의 전화와 문자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주영이는 엄마가 다른 일로 바쁜 시간이면 수시로 내게 전화를 한다. 늘 들뜬 목소리로 즐거운 이야기만 한다. 복잡한 인간사 따위는 논하지 않는다. 과거의 추억이나 현재의 행복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주영이와 통화할 때면 나도 즐거워진다.  

올해 들어서 나와 꾸준히 통화하는 제자가 한 명 더 늘었다. 대학 졸업 후 새내기 교사로서 만난 나의 첫 제자 진호. 당시 초등 2학년 자폐성 장애학생이던 진호는 30대 중반의 청년이 되어 부산에서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손님이 거의 없다며 심심한지 매일 전화를 했다. 일방적이지만 아주 젠틀하게 말한다. “오늘 사직야구장에 갔다 왔어요. OO이 이겼어요.” 내 말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전화 끊을게요”라며 ‘용건만 간단히’의 전화 예절을 제대로 지킨다. 어느 날부터인가 지인들에게 전화하는 재미를 알았나 보다. 

 

장애학생 졸업 후엔 친구관계 유지 어렵지만

학교 다닐 때 친구들 기억하고 있어

우리나라 학령기 장애학생의 70% 이상이 일반학교에서 통합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사회에 통합될 기회가 없고, 졸업한 친구들에게 연락하며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성인이 된 제자들 대부분은 복지관 외에는 누군가를 만날 기회 없이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나 선후배가 거의 없지만 학교 다닐 때의 친구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주영이 엄마와 진호 엄마는 너무 잦은 전화가 방해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신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먼저 다가오는 그들의 목소리는 나에게 큰 기쁨이다. 그만큼 주영이나 진호가 친구나 동료, 그리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더 성장하고 발전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험하고 먼 길일지라도 이야기 나눌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지 우리는 알고 있다. 장애인에게도 함께 걸을 친구가 필요하다.  

한편 장애이해교육 강의를 하러 가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장애인의 특성이 뭐예요?”

아마도 장애인에 대해 이해하려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몇 문장으로 답할 수 없다. 나는 조심스레 되묻는다. “음? 그럼 일반인, 비장애인의 특성은 뭐죠?”

누군가가 비장애인에게 특성을 말할 수 있다면 장애인의 특성도 그 정도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장애인이 각자 다른 특성이 있는 만큼, 장애인도 모두가 다르다.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이다. 장애인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을 그냥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뭔가를 함께 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을 귀담아듣고, 천천히 말하고, 기다려줄 수 있으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언젠가부터 ‘장애우(友)’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장애인을 더욱 친근하게 대하려는 의도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려는 의지가 느껴지지만, 사실 나는 장애우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인들은 흔히 어린아이에게 “OO 친구~”라 말하며 친근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교사나 목사에게는 아무리 친해지고자 해도 ‘선생 친구’, ‘목사 친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아랫사람을 대할 때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OO 친구’라는 조금 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고는 한다. 마찬가지로 장애우라는 표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나보다 낮은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그들을 불특정 다수가 ‘장애 친구’라 부르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장애인이라고 무조건 내 마음대로 친구라고 해도 될까? 장애인은 이때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당신과 친구예요? 처음 봤는데….’, ‘저를 아세요? 전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아마도 이런 생각이 아닐까. 

지체장애를 가진 한 친구가 있다. 한쪽 다리가 더 짧고 관절이 많이 약해서 걸음이 불편하다. 그런데 난 그 친구를 장애우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아니, 장애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가끔은 그 친구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잊고 나의 빠른 걸음걸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걸을 때가 종종 있다. 그 친구는 장애인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여자인 것이 맞지만 누가 나를 굳이 ‘여자’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장애우’라는 용어를 쓰기보다 진짜 ‘장애인의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한 명의 열 걸음보다 열 명의 한 걸음이 더 크다는 말이 떠오른다. 장애인과 한 걸음씩이라도 함께하는 진짜 친구가 많아져서 더불어 사는 멋진 세상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그대가 오늘부터 또 다른 주영이와 진호의 친구로 함께 걸어가기를 기대한다. 

송명숙 중앙기독초 특수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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