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가 너무 어렵고 그 속에서 유독 지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릴 적,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투명한 유리 상자 속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핏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몇 달은 사람들이 서로의 파이를 깎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살면 덜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시기였다. 나는 그동안 혼자만의 시간이 분명 필요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고 스스로를 정의해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답답함에 가끔 숨이 차오르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일상 속에서 붙잡고 있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답답함에 메인 목을 축이고자 밤이면 바람 쐬러 산책을 나갔고,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치를 발견했다. 공원 벤치라고 부르기에는 소박하고, 길가 도로변에 놓여있는 벤치로 치부하기엔 아늑했다. 안정감 있게 가운데 배치된 나무를 등지고 ‘ㄴ’자로 벤치 두 개가 가만히 놓여있는 곳이었다.

밤이면 벤치로 나와서 새벽까지 앉아있다가 집에 들어갔다. 벤치는 사람들이 가끔 지나다니는, 바람은 불지만 고요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적극적으로 뭔가를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고,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통화를 했다. 그렇게 감정의 굴곡을 더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감정이나 날씨의 기복에도 개의치 않고 매일같이 벤치를 찾았다. 단지 그 공간이 주는 안정감에 나를 적셨다.

이후, 어딘가에 갈 때마다 주변에 있는 벤치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여느 동네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면, 벤치에 앉는 일은 시간을 내서 그곳에 잠시 머물다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푸코가 말했듯, 우리 사회에서 무위는 일탈이 된다.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벤치는 이미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거리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벤치가 그 날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은 나 역시 잠시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해 적극적으로 무위를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대 사회에서 나 혼자만의 공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한 발 나아가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서로 겹쳐진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그런 행운에 힘입어 나는 벤치에서 스스로와 마주할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았을 때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매일 새로운 감정을 안고 찾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곳에서 나는 굉장히 느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당연히 외로울 때도 많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외로움을 하나쯤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점을 기억하면 언젠가는 마주해야 했을 나의 외로움을 포용하는 것 역시 크게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벤치에서 일상의 것들을 비우고 생각을 채울 때면 나는 홀로 서 있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쓰러져도 금방 일어날 수 있는 힘의 출발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는 공간이기에 오늘도 벤치에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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