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바퀴벌레’, ‘착짱죽짱(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 ‘바이러스 그 자체’. 모두 중국인을 가리키는 혐오 표현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는 기사들이 터져 나오자 중국인 혐오가 시작됐다. 아니 더 심해졌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한국 사회 곳곳에 이미 중국인 혐오는 만연했으니까.

1월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중국인 입국 금지 요청’이란 제목의 청원 글이 올라왔다. 해당 청원은 2월22일 76만1833명의 동의를 얻고 마감됐다. 코로나19 감염원을 차단하기 위해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국내 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중국인의 입국을 막아야 코로나19 상황이 해결될까.

2월18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 ‘코로나19, 사회적 충격과 전망’ 긴급 좌담회에서 서울대 이현정 교수(인류학과)는 “이미 국내 코로나19 감염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중국인의 입국을 막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혐오적 조치는 오히려 감염자가 감염 사실을 숨기거나 밀입국하는 등의 위험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제적으로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한 이탈리아, 이란 등의 국가에서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전파 소식으로 가득했던 올해 겨울, 본교 커뮤니티엔 ‘중국’과 ‘중국인’을 혐오하는 글이 쏟아졌다. 커뮤니티는 한동안 중국과 코로나19 관련 글로 도배됐다. 당시 나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취재하던 중이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같이 수업을 들으면 손가락질받을까. 기숙사에 입사하면 룸메이트가 싫어할까. 그러면서도 코로나19가 심각해 중국인을 꺼리는 정서를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은 결국 1학기 휴학을 택했다.

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중국 초등학교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과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던 나는, 중 학교에 들어가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의 눈총을 받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내 은사가 됐지만, 학기 초반엔 선생님이 한국인에 대해 가진 편견 때문에 힘들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이 싫다고 했다. 작은 나라가 발전하려면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한국인 유학생들은 맨날 모여 놀기만 하고 공부도 안 한다며 무시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인 유학생을 달가워하지 않는 중국 선생님은 그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보란 듯이 열심히 공부했고 중국인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이런 내 진심을 느꼈는지 선생님도 점점 마음을 열었다. ‘한국인’이 아닌 나라는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여타 중국인 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나를 대했다. 그는 학교 최초로 관례를 깨고, 학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주지 않던 기회를 내게 주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온전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여기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인 유학생이라고 차별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중국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있다니. 구체적인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정체성’을 혐오의 지표로 삼은 것은 분명했다.

코로나19 확산은 생명과 직결된 만큼 모두에게 크나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처음 겪는 코로나19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분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고, 무분별한 비난과 혐오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이 됐다. 처음에는 중국인, 그다음은 신천지, 대구, 이태원. 코로나19가 확산하는 동시에 혐오의 대상도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만 지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체성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 나도 언젠가 내 정체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타인을 겨누던 혐오의 화살은 나를 향할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될 만하지 않다. 누군가의 정체성, 겉모습, 소문 때문에 ‘거리 두기’보다 함께 걸으며 거리를 좁히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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