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엽(영문∙08년졸) 씨네21 편집장
장영엽(영문∙08년졸) 씨네21 편집장

좋아하는 영화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영화를 처음봤던 날의 상황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를 보던 날의 풍경과 날씨, 그날의 기분, 영화를 함께 보았던 사람과의 에피소드. 그 모든 요소가 모여 한 편의 영화에 대한 관람의 기억을 완성하는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독서를 사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떠올리다 보면 책을 마주했던 그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가운데서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풍경은 책을 보기 위해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계단을 오르내리던 대학 시절 나의 모습이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질 정도로 소소한 소망이었다 싶지만 대학에 입학하기 전 까지 나의 위시 리스트 중 하나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당대 대중문화가 묘사한 대학의 풍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청춘 드라마와 시트콤,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가 쏟아졌던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는 한 손에 전공 서적을 들고 교정을 거니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캠퍼스의 주요 공간인 도서관은 서로 마주할 일 없던 청춘들이 우연히 새로운 인연을 맺는 계기를 제공하거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는 등 한국 청춘물의 스토리텔링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공간으로 묘사됐다. 그 때문에 대학 생활을 영화와 드라마로 먼저 배운 열아홉 살의 나는 도서관에서의 독서를 낭만과 청춘, 지성과 자유라는 대학생의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느꼈다.

이런 연유로 대학에 입학한 뒤 중앙도서관을 자주 찾기 시작했다. 설익은 동경으로부터 시작된 습관은 대학 생활의 낭만에 대한 환상이 사라질 즈음에도 지속되었다. 왜 그렇게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을까 생각해보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나이에 온전히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늘 마음이 편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기라도 한 듯 외부 세계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해주는 그곳의 고요함이 좋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무언가에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시간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서가를 배회하다가 그날의 기분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책을 골라 읽었다. 맥락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읽는 독서는 나름의 일탈 행위였다. 아프리카 대륙부터 우주 저 너머까지 가로지르는 책들의 광활한 스펙트럼은 앉은 자리에서 지금, 여기로부터의 신속한 탈주를 가능하게 했고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일에 대한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곤 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독서가 늘 그렇게 흥미진진했던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책을 덮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확실히 책을 읽는다는 건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문제집을 푸는 일처럼 단기간에 성장을 보여주거나 효율적이지는 않다. 시간과 공을 들여 책에서 읽은 내용이 인생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언젠가 책에서 읽고 무심코 기억했던 구절들이 삶의 어떤 대목마다 불쑥 끼어들어 의외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고 책을 매개로 한 ‘유레카’의 순간에는 유통기한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기자로서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에야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버지니아 울프(「자기만의 방」)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팩트 체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뉴스와 선정적인 보도로 위기를 맞고 있는 최근의 저널리즘을 생각하면서 이미 1970년대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통해 비슷한 위기를 예견했던 하인리히 뵐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기도 했다. 미국의 방대한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는 미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마다 자주 뒤적이는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집은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나에게 오랫동안 마감의 동반자 역할을 할 매혹적인 재즈 넘버들을 알려줬다.

이처럼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내가 지각하지 못한 사이 삶의 형태와 사적인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가치 판단이 필요한 순간마다 한 걸음 멈춰서서 숙고하는 근성을 길러주었다. 지금은 업무에 쫓겨 대학 시절 만큼 많은 양의 책을 읽지 못한다. 읽더라도 필요와 목적에 의한 독서의 비중이 높은 편이라 안타깝다. 쏟아지는 정보들과 쫓아야 하는 트렌드 사이에서 방향성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때마다 중앙도서관을 거닐며 책과 오롯이 대면했던 몰입의 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짐작건대 그러한 몰입과 사색의 시간은 앞으로도 쉽게 누리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언제라도 중앙도서관의 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당신들이 부럽다고 말하고 있다.

장영엽 <씨네21> 편집장

*국내 유일 영화주간지 <씨네21>의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등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올레TV ‘스타케치’, KBS ‘한밤의 영화음악실’ 등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다. 공동 집필한 책으로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인」이 있다. 현재 <씨네 21>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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