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가져온 습관이 하나 있다. 오늘 하루 계획을 세우고, 자잘한 일이라도 모두 기록하는 것. 스터디 플래너로 시작된 나의 기록은 손바닥만한 수첩으로 이어졌다. 대학 입학 이후론 이 수첩이 내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젠 수첩 없인 하루를 시작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이 순간도 이 글을 마무리한 후 수첩에서 상록탑 원고 쓰기를 지우겠지.

학보 기자로 일하면서부턴 수첩에 인터뷰 일정을 메모하고, 마감날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적어둔다. 마감날 잠자리에 들기 전엔 빠진 일 없이 하루 일과를 짧게 기록한다. 휴대전화 터치 몇 번으로 일정을 기록하는 마당에 참으로 아날로그적인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다이어리보다 수첩을 고집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사 아이템을 적거나 취재원의 전화에 자다 깨 답변을 받아적을 때, 이만한 파트너도 없다. 이제 곧 퇴임을 앞둔 2년 차 학보사 기자로서, 취재의 매 순간 수첩이 영혼의 단짝처럼 함께 했다. 돌아보니 대학에 온 후 다 쓴 수첩만 5개가 넘는다. 재작년의 5월이 궁금하면 흰색 수첩을 꺼내 보면 된다. 수첩 속 기록은 내게 소중한 자산이 됐다.

언론인을 꿈꾸는 4학년 학생에게 매일을 기록하는 건 좋은 습관이겠지. 언젠가 현직 기자 선배로부터 언론인이라고 해서 매일 특종을 터트리는 것도 아니라는 얘길 들었다. 1명의 특종 기자 뒤에는 999명의 기록자가 있다는 것. 그저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역사로 남기는 일의 위대함을 전해 들었다.

현장의 중심에서 시대를 기록하는 건 언론의 특권이자 막중한 책임감이다. 그러나 언론이 ‘기록’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는지는 100% 확신할 수 없어 씁쓸하다. 지난 한 주 매스컴에선 1980년 5월의 광주를 뒤늦게나마 기록하는 듯 보였다. 1980년의 언론들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던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해자들을 기리고, 당시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 싸웠던 열사들을 추억했다. 무고하게 학살된 민간인 피해자의 남겨진 가족들도 조명됐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지닌 독일은 정부가 나서서 과오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고 있다.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독일은 나치시절 유대인수용소에 근무한 이력이 있는 이들을 아직까지도 재판에 넘겨 확실하게 처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지금이라도 독일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상처받았던 모든 이들을 돌보고 진정한 사과를 건네는 태도가 필요하다.

기록의 의무가 있는 언론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록하는 게 훗날 거대한 역사적 전환의 한순간을 기록했던 사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의 힘은 실로 대단하기에, 오늘도 펜을 꺼내 하루를 계획하고 지나온 하루를 평가해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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