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향 북한학과 교수
김석향 북한학과 교수

모든 이화인이 다 그렇게 느끼겠지만 5월의 교정은 정말 아름답다. 눈을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보면 화려한 색상으로 피어나는 꽃보다 한층 더 싱그러운 연초록 잎사귀가 온통 하늘을 뒤덮는다. 어쩌다 눈길을 발밑으로 내려 보면 이름도 모르는 풀이 곳곳에 자리를 잡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땅의 5월은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봄날의 기운이 함께 하는 시절이라는 느낌이 매일 새롭게 다가온다.

올해의 5월이라고 해서 이런 풍경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또 실제로 달라진 모습도 전혀 없다. 그런데 올해의 봄날은 하루하루 이화의 교정을 볼 때마다 뭔가 빠져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든 사물이 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늘 이곳저곳을 꽉 채워주던 학생들이 별로 없으니 이화의 교정도 어딘가 허전한 기운을 뿜어내는 느낌이 들어 스산해지기도 한다.

75분 수업을 마치고 난 이후에는 15분 동안 다음 강의 장소를 찾아 무리를 지어 몰려 다니던 학생들은 이제 화면 속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실시간 원격수업으로 화면 속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전에 몰랐던 유형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일도 있는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원격수업과 강의실 수업을 병행해 보면 어떨까 하는 도전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도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학생들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불편함도 별로 없으니, 결국 진정한 의미의 쌍방향 교육이 가능한 시대가 왔다고 느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단순히 익숙함을 벗어나지 못한 탓일까? 딱 부러지게 원인을 찾아내지 못 하지만 원격강의로 이어지는 오늘의 실시간 수업 현장이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현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2020년 5월의 어느 날, 이화의 교정이 오늘과 같은 모습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은 없었으리라고 믿는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아무도 예측하지도 못했지만 앞으로 위기를 잘 정리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예전처럼 평온한 일상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문제는 새로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될 것인지 아무도 확실하게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측이 확실하지 않으니 자연히 대응 방안도 확실하지 않다. 비록 대응 방안을 마련한다 해도 그 효율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할 것이다. 당연히 일상의 불편함이 이어지겠지만 예전처럼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감내해야 한다는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갑자기 밀어닥친 새로운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그보다 범위를 좁혀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무심코 눈길을 돌리다가 사회 곳곳에서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현실에 대처하면서 예전처럼 “그저 별다른 일 없는” 일상의 평온함을 누리던 세상을 유지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서 몇 차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었다. 수많은 의료진과 방역 전문가 집단 이외에도 하루 확진자가 900명을 넘나드는 날에도 열심히 생필품을 생산하고 배송하고 판매하고 또 폐기물 처리를 담당해 주시는 우리 이웃의 손길이 없었으면 ‘그저 별다른 일 없는’ 일상의 평온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호사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특권이라는 사실 자체가 꽤 낯설고 충격적으로 현실로 다가왔다. 이런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지만 되짚어 보니 돈을 지불하면 각자 자신이 원하는 물건과 서비스를 원하는 시간에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평범한 일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은 뜻밖에도 ‘별다른 일 없는 일상의 평온함’ 그 자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었는지 깨닫는 순간을 매일매일 경험할 수밖에 없는 나날을 보낸다. 이런 깨달음에 이어 직업병이 도진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 지역에서 삶을 이어나갈 사람들 일상을 생각하는 순간에 빠져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누로 흐르는 물에 30초 이상 손을 깨끗하게 씻고 마스크를 꼭 착용하라는 안내를 받으면서 그곳에는 흐르는 물이 충분한지, 비누는 넉넉하게 구할 수 있는지, 마스크는 원하는 만큼 언제라도 쉽게 구매하는 것이 가능한지, 중국에서 생필품이 들어가는 길이 예전보다 어려워졌을 것인데 일상의 평온함을 누리기는 하는지 생각이 복잡하다.

다시 내 주변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수많은 손길의 고마움을 토대로 일상의 평온함을 특권으로 누리고 있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 만큼 나도 다른 사람이 평온하게 사는 데 기여하는 방식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한다고 나 자신을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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