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한국 사회는 ‘n번방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가해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고 신상을 공개하라는 청원에는 268만명 이상이 동의했고, 신상이 하나 둘씩 공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해 여성들은 높은 관심을 보였다. 내 주위의 여성들도 분노로 SNS를 가득 채웠고 남성 중심적인 판결과 여성을 도구로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열기와 관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처음 청원이 올라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주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건에 함께 행동하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남성 중심적 포르노 문화가 만연하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이 사건에 대해 화가 나기는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끔찍한 사건들에 지속적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무감각해지는 걸까. 나는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 피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감 피로’란 지구 곳곳에서 들어오는 우울한 뉴스와 사진의 집중 폭격을 끊임없이 받다 보니 심리적으로 탈진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감 피로의 어원은 간호사와 같은 감정 노동이 심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단어였지만, 의미를 확장해 본다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디어와 SNS가 급속도로 발달한 지금, 우리는 사회 내의 여성 혐오 범죄를 비롯한 여러 끔찍한 사건들을 굳이 클릭하지 않아도 미디어 매체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게 됐다. 사회 속 비정상적인 범죄들을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그러한 사건을 하나 더 접한다고 해도 특별히 끔찍하다는 감정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의 이면에는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이 있다는 것을 회피하고 싶은 우리의 심리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21세기 신자유주의 사회 속 내 할 일만 잘 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나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되는 부인과 회피 속에서 누군가는 끔찍한 범죄로 분명히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무뎌지지 않고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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