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과학자의 삶, 선택의 순간마다 책이 있었다
[읽어야 산다] 과학자의 삶, 선택의 순간마다 책이 있었다
  • 차선신 화학·나노과학과 교수
  • 승인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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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신 화학·나노과학과 교수
차선신 화학·나노과학과 교수

독서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다. 주어진 틀에서 생활했던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자율성에 기초한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 한 나는 불규칙적인 생활과 그 결과로 찾아 온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때 어떤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선신아, 네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안 하다 보면 못 하게 된단다”.

모든 것이 엉망이어도 자존심 하나로 버텨 온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다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면 어쩌지?’ 뭐라도 시작해야 했던 나는 종로에 있는 영풍문고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때 구매한 최초의 책이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였다.

독서 덕분에 나는 점점 무기력에서 벗어났다. 주로 양자역학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교양과학 서적이 주를 이뤘다. 미생물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었던 내가 양자역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상보성’, ‘불확정성’, ‘파동·입자 이중성’ 같은 개념들에 매료됐다. 결국 미생물학 관련 과목 이수는 최소화하고 <현대 대수학>, <미분방정식>, <물리화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는데, 3, 4학년 때 접한 <생화학>, <생물물리학> 같은 전공과목들은 오히려 개인적인 흥미에 따라 들었던 교과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즐겁게 공부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나는 대학원 진학이라는 진로를 정했다.

세부 전공을 결정할 때에도 독서의 도움을 받았다. 생화학과 생물물리학 분야 최고의 과학자들이 저술한 ‘우연과 필연’과 ‘이중나선’을 읽은 뒤였다. ‘우연과 필연’에서 나는 생체고분자의 3차원 입체구조가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중나선’을 읽고선 생체고분자를 연구하는 과학자의 삶이 결코 단조롭지 않고 활력이 넘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단백질 혹은 DNA의 3차원 입체구조를 규명하는 ‘X선결정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바이오 분야 대학원생의 생활은 경험하지 못 하면 실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다. (관련 분야 대학원생들에겐 ‘느낌 아니까’ 그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무기력감은 자취를 감췄다. 항상 의욕이 넘쳤고, 뭔가를 이루기 위해 애썼고,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서도 충만함을 느꼈다. 이 시절엔 역사소설이 나의 정신적인 휴식처였다. 보통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기숙사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1시간 정도 책을 읽었는데, 매일 꾸준히 읽은 덕에 그 전엔 엄두를 못 내던 장편 소설을 많이 봤다. ‘삼국지’, ‘장길산’, ‘대망’, ‘임꺽정’, ‘조선왕조실록’ 등등. 요즘도 가끔 우리 방 학생들에게 그때 읽은 소설 이야기를 해준다. “너희들은 그것도 모르니!” 하면서.

 

대학생 시절 엄습한 무기력

양자역학 서적 읽으며 벗어나

 

눈코 뜰 새 없었던 대학원생 시절

역사소설로 정신적 휴식

박사 학위를 받고 포항가속기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취직했다. 대학원생 때의 관성 그대로 앞만 보고 달리는 생활을 이어 가던 중 문득 옆도 보이고 뒤도 보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때 읽었던 책이 ‘즐거운 불편’(달팽이출판)과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라는 책이다. 10년 만에 안단테로의 귀환이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책을 만난 것이다. 끊임없이 온라인으로 연결된 과잉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는 두 책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이때부터 불필요한 욕심을 줄이고, 필요 없는 것은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일상생활 중에 걷는 시간을 늘리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으로의 이직은 독서생활에 촉매 역할을 했다. KIOST에서는 모든 직원이 독서 통신 교육을 받아야 좋은 고과를 받을 수 있었다. 독서도 하고 좋은 평가도 받는 일석이조의 혜택을 나는 톡톡히 누렸다. 주로 리더십, 행동경제학, 심리학, 철학 등의 서적을 읽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갈 수 없다는 것, 어려운 순간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작은 성취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화려함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위대한 성취의 맹아가 싹튼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2016년 내 고향과도 같은 신촌에 자리한 이화로 온 뒤로는 전공과 관련된 교양과학서적을 중심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 읽었던 좋은 책들은 옆에 두고 반복해서 읽는다. 수업 중엔 기회가 될 때마다 책 속의 지식과 과학자로서의 체험이 반응하여 탄생한 생각들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삶의 선택과 고비의 순간마다 책이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어려운 순간을 가끔씩 마주한다. 절망에 빠질 때도 있고, 알 수 없는 불안에 잠 못 이룰 때도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독서를 하며 힘을 얻는다.

차선신 화학·나노과학과 교수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포스텍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포항가속기연구소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을 거쳐 2016년 본교 화학·나노과학과에 부임해 생화학과 일반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현재 신약표적단백질 연구실에서 질병 치료 약물 개발 및 특이 생명현상의 산업적 활용에 기여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우수강의상(2008, UST), KRIBB 학술상(2010, 한국미생물학회),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2011,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우수신진연구원(2011, 기초기술연구회), 최우수논문상(2012,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본교 영어강의우수상(2018)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