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논의의 제문제들을 분석한다 ㅡ <2> 기호·여성 그리고 미 우리를 둘러싼 미에 대한 기호 해체시킬 수 있어야 3. 미의 기호화 필요소비라는 기본적인 개념은 자여느럽게 무화되기에 이르며 우리는 소비사회의 전사가 되기 위해 그 사회, 혹은 몇몇 기업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놓은 미의 규저에 따라 내 자신을 기호화해가는 것이다.

현대소비사회에서 미란 차이의 질서 속에서 기능하는 잉여적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미 차제가 아니라 미에 대한 관념에 관여하며 이 미에 대한 관념은 기호화되어 사회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분화되어 나간다.

예를 들면 현대 우리사회에서 미를 규정하는 한 개념이 신장이다.

사실 키가 작다는 것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그 자체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적어도 165cm는 되어야 한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파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사람들에게 각인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165cm라는 기호를 기준으로 167, 163, 170, 160 … 등의 기호들에 주목하는 데 각각의 기호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의 말대로 상이한 것들의 차별성 속에서 의미로 드러나는 것이다.

즉 160이라는 기호는 155라는 기호와 165라는 기호 사이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지 그 자체가 구체적으로 내용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10cm의 작은 차이는 원래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던 필요신장, 예를 들면 150cm를 완전히 무화시켜버리고 과잉신장들의 차이의 질서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기에 이른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와 같은 현상은 필요/불필요의 개념을 무화시키고 과잉성을 필요성으로 전환시키려는 현대소비사회의 전략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현상을 「기표에 대한 물신숭배」라고 비판한다.

기표에 대한 물신숭배란 기호화된 인위적인 것에 주체가 사로잡히는 현상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물신숭배는 물건에 대한 신성화가 아니라 기호로 표현되는 상품에 대한 신성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수학에서 1과 0 사이를 무수히 나눌 수 있는 것처럼 기호화된 상품을 현대사회의 의미로서 무수히 창출해낸다.

이에 따라 필요소비라는 기본적인 개념은 자연스럽게 무화되기에 이르며 우리는 소비사회의 전사가 되기 위해 그 사회, 혹은 몇몇 기업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놓은 미의 규정에 따라 내 자신을 기호화해 가는 것이다.

내가 내 모습에 점수를 매겨 (이것이 생활 속에서 기호화가 침투된 구체적인 예이다) 성형수술을 하거나 화장품이나 유행하는 곳으로서 나의 개성을 표현한다면 그성이 성공으로 평가되든 실패로서 평가되든 나는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그럼으로써 분화되는 미의 기호들의 차이들의 질서속에 편입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때 나의 「나만의 세계」추구는 나의 세계의 포기가 된다.

물론 기호화된 미가 분화되어 나가는 과정의 매개가 되는 것은 기업들의 유행만들기 전략이다.

계속 상품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지속적으로 팔아야 하는 기업의 유행만들기의 첫번째 전략은 아무래도 미의 상대성의 유포이다.

구체적인 상품을 지속적으로 팔아야 하기 때문에 미의 상대성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

지난 호 이주향의 글에서처럼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유행에 따르는 행위가 미를 보장해주는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입는 것이 왜 아름답지?』에 대한 이유를 현실세계 내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기호의 세계에서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처럼 미가 규정되는 방식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 소비사회의 사도된 우리에게 「왜 아름다운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4. 「왜?」와 반성적 능력 우리를 둘러싼 미에 대한 기호를 해체시킬 수 있는 반성적 능력을 키워가지 못할 때 여성해방에 대한 우리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왜?」를 질문한다는 것은 철학적 반성의 출발점이다.

특졍한 체계 바깥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질문인 그 질문은 그럼으로써 그 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작은 것부터 질문해야 한다.

「왜 코의 높이가 몇mm 높아지는 것을 아름다워졌다고 느끼는가?」「왜 최진실을 흉내내기 위해 옷을 입으려 하는가?」「…차를 가지고 데이트를 하는 것이 왜 세련된 것인가?」 나르시스의 자기사랑은 자아가 눈을 떴다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해 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과 통할 것이다.

그런데 쇼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 때 당신이 보는 것이 누군가와 비교된 자기자신이라면 당신은 자아에 눈을 뜬 나르시스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규정된 그 어떤 것에 함몰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미에 대한 기호를 해체시킬 수 있는 반성적 능력을 키워가지 못할 때 여성해방에 대한 우리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김동일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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