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책 도둑 다이어리
[읽어야 산다] 책 도둑 다이어리
  • 강태경 영어영문학부 교수
  • 승인 2020.04.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태경 영어영문학부 교수
강태경 영어영문학부 교수

책을 훔쳤다… 나도 그리고 그도

열네 살, 생애 첫 책을 훔쳤다. 용돈이라고는 버스값 외엔 한 푼도 없던 시절, 방과 후 가끔 들러 이 책 저 책을 부러운 마음으로 들춰보던 동네서점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문고판 책 한 권을 교복 안 허리춤에 꽂아 넣고 주인아저씨의 시선을 용케 피해 문을 여는 순간, 짤랑짤랑 문에 달린 초인종 소리에 기겁을 했다. 의심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뒤통수에 박히는 느낌에 가슴은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돌아설 수는 없었다. 문턱을 박차고 달렸다. 인적 없는 골목에 접어들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벼락에 기대어 허리춤에서 책을 꺼낸다. 학교 도서실에서 몇 권 째 탐독하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가운데 들어보지 못한 제목이었다. ‘쥐덫’(Mousetrap).

‘쥐덫’을 훔친 것은 철없는 중학생만이 아니었다. 추리소설의 고전이 된 이 작품의 제목을 작가 크리스티는 연극의 고전에서 훔쳤다. ‘햄릿’의 극중극 장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생생한 재현을 보면 살인자의 찔린 양심이 스스로 죄를 토해놓을” 거라는 생각으로 햄릿은 유령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살해 정황과 흡사한 ‘곤자고의 살인’이라는 연극을 숙부 앞에 펼친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던 숙부가 조심스레 극의 제목을 묻는다. 원제와는 다르게 햄릿은 촌철살인의 답변을 내놓는다. ‘쥐덫’. “연극이야말로 왕의 양심을 낚아챌 덫”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극의 제목만 바뀐 게 아니다. 공연 전날 햄릿은 배우들의 대본을 훔친다. 그리고 원작에 없던, 왕의 양심을 정확하게 찌를 치명적인 대사를 슬쩍 써넣는다. 절묘한 삽입, 기발한 각색, 또는 악마의 편집? 어떤 이름을 붙이든 햄릿은 ‘곤자고의 살인’을 훔쳐 ‘쥐덫’으로 만들었다. 이 창조적 도둑질은 성공을 거둔다. 살인이 일어나는 극의 절정에 왕은 감전이라도 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찔린 양심을 붙들고 황급히 객석을 빠져나간다.

남의 책을 훔치고 훼손까지 하는 절도행각을 벌인 건 햄릿만이 아니다. ‘햄릿’의 작가는 오비드의 ‘변신’과 버질의 ‘아이네이드’, 플루타르크의 ‘영웅전’과 신구약 ‘성경’에서 무단 표절한 이야기와 이미지들로 ‘햄릿’을 가득 채운다. 저작권 없는 고대문서들이니 별 상관없다손 치더라도, 이 뻔뻔스런 작자는 동시대 최고의 수필가 몽테뉴의 ‘수상록’으로부터도 - 일일이 따져본 학자들에 의하면 - 무려 59개의 구절을 훔치고, 런던연극계의 스타작가 말로우의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비극’에서는 아예 한 장면을 통째로 퍼다 날라 ‘햄릿’ 속에 들여온다. 물론 온전히 보존한 게 아니라 자신의 주인공 햄릿처럼 원전을 훼손시키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일부 대사와 장면뿐 아니라 ‘햄릿’ 자체가 절도, 그것도 국제적 연쇄절도 사건의 산물이다. ‘덴마크 역사’(1514)에 수록된 중세설화를 프랑스 작가가 훔쳐 ‘비극적 설화집’(1570)으로 옮겼고, 이 프랑스책의 내용을 훔쳐 런던연극 ‘원-햄릿’(1588)이 탄생했다. 그런데 ‘원(原)-햄릿’이라니? 1588년이라니? 그렇다, 1601년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은 ‘오리지널’ 창작이기는커녕 바로 십여 년 전 공연된 – 지금은 작자미상에다 대본마저 소실된 – 동시대 극작품을 훔친 것이다!

밤새워 읽고 베낀 도둑질 천재

셰익스피어는 서른여덟 편의 극을 썼다. 극작경력 16년, 매년 두 편 이상을 꾸준히 썼다. 그 가운데 세 편을 제외하면 모두 히트작이다. 놀라운 다산성과 탁월성, 역시 천재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비결은? 아니나 다를까, 책이다. 정확히는 책 도둑질이다. 서른여덟 편 중 단 한 편을 뺀 서른일곱 편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표절이다. 열 편의 사극은 모두 영국역사서에서 훔쳐온 이야기다. 열 편의 비극은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각종 중세사 문헌에서 퍼다 날랐다. 열일곱 편의 희극은 외국설화집의 내용을 베꼈다. 셰익스피어는 천재가 맞다. 도둑질/재활용의 천재, 표절/재창작의 천재말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젊은 시절과 사랑을 그린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년). 1999년 71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미라맥스 사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젊은 시절과 사랑을 그린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년). 1999년 71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미라맥스 사진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기발하게 훔치고 절묘하게 퍼다 나르고 멋있게 베꼈냐고? 장물을 독차지 하지 않고 사람들과 나누었기 때문이다. 훔친 책을 재활용한 대본 초안을 동료배우들의 피드백을 통해 고치고 또 고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콜라보에 있다. 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창조적 재활용을 이뤄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개인적 천재성을 굳이 말하라면, 그는 오늘날 그렇게도 쓸데없다는 노오력의 천재였다. 낮에는 배우로 밤에는 작가로 살아간 그는 주경야독의 살아있는 전범이다. 서른일곱 편의 작품을 쓰기 위해 그 몇 배의 원전을 읽었다.

투잡족이면서 어떻게 그 방대한 양의 독서가 가능했냐고? 전기조명은 물론 가스등도 없던 당시 연극 공연은 오후 두시에 시작해 다섯 시경 끝났다. 예나 지금이나 배우들은 뒤풀이를 하러 술집에 간다. 셰익스피어도 갔다. 딱 1차만. 흥겨워지는 술자리를 뒤로하고 런던 변두리 원룸 하숙집에 돌아와 밤을 새워 읽고 베꼈다. 당시 변방의 섬나라였던 영국에서는 유럽본토 여행이 유행이었다. 귀족과 부유한 평민층은 물론 연극인들까지도 세상의 중심 프랑스와 이태리를 다녀오지 않고는 양반행세를 할 수 없던 시대적 분위기였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영국 땅을 떠난 적이 없다.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여행사 광고카피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룸에 틀어박혀 다음에 훔칠 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책 속에서 ‘진짜’ 세계를 발견하고 있었다. “오, 용감한 신세계여!”(O brave new world).

서른여덟 작품 중 단 한 편, 책을 훔치지 않고 쓴 작품은? ‘윈저의 명랑한 아줌마들’이라는 희극. 윈저라는 지명을 무단으로 빌려오긴 했지만 (또 도둑질!) 사실 셰익스피어의 고향마을 이야기다. 이 극에는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초등학생이 등장한다. 학교에서 라틴어 교습을 받던 아이는 교실에 비치된 공용교재 한 권을 슬쩍한다. 책 살 형편이 안 되는 흙수저라서? 아니다, 부모는 그 마을 기준으로는 중산층이었다. 그럼 왜? 책 자체가 발산하는 광채 때문이었다. 고전의 보고를 여는 열쇠 라틴어의 매력이 소년을 절도 초범으로 이끌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탄생했다. 책을 읽자고? 아니다. 훔치고 베끼고 재활용하자. 필자가 저지른 치기어린 방식 말고 햄릿과 그 저자가 훔친 창조적 방식으로. 

강태경 영어영문학부 교수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셰익스피어와 현대영미드라마를 가르치며 공연 현장에서도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호모 아메리카노: 미국연극의 배우, 인간, 문화’, ‘브로드웨이의 유령: 한 연극학자의 뉴욕 방랑기’, ‘오이디푸스 왕 풀어읽기’, ‘에쿠우스 리포트: 런던발 뉴욕행 1974’, ‘(연출적 상상력으로 읽는) 밤으로의 긴 여로’ 등이 있으며, 셰익스피어학회 우수논문상과 재남우수논문상을 수상하고 두 번에 걸쳐 강의우수교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에 필자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강태경 교수가 직접 보내왔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훔친 강태경’. 집필 중인 책 제목이 ‘역사를 훔친 셰익스피어’라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에 필자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강태경 교수가 직접 보내왔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훔친 강태경’. 집필 중인 책 제목이 ‘역사를 훔친 셰익스피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