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다양한 경험, 현실의 공격무기

사실상 충격이랄 수도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레스트로이카의 호들갑스러움은 정도가 깊은 민족문학의 뿌리를 흔들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이들의 파동이 민족문학을 잠깐동안이나마 「우려」와 「지성」으로 몰아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빠르고 입이 가벼운 몇몇 문예 종사자들의 경험에 의지하지 않은 사변에 불과했다.

어쩐지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레스트로이카의 새로움에 대한 관심과 논쟁이 벌써 어제일 같은 생각이 들며 그 증후군들은 점점 빛을 잃어가는 느낌이다.

소련과 동구의 변화 그리고 「제국주의 독점자본주의 문화이론」으로서 한문화현상에 불과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처럼 한 유행현상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은 우리가 페레스트로이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거나 배태할 만한 현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현실은 그들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입증케 한다.

바로 우리 이곳의 현실이라는 중후한 땅(근본)은 심이 약한 지표면의 풀잎이 외풍에 경박스럽게 흔들려도 뭐라하지 않고 그대로 끌고가는 거대한 역사와 같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 현실에 아주 상관 없는 뭐라는 것은 아니다.

세계라는 거대한 역사의 바퀴는 여럿의 현실과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이곳·지금의 현실이다.

바로 이 현실을 올바로 세울때 바른 미래를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과거에서 미래 사이에 놓인 다리이다.

이 현실이라는 다리를 통과해야만 미래로 갈수 있다.

우리는 지금 현실이라는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이탈하지 않는 한 시간은 우리를 항상 이 현실위에 세운다.

그럼 이 현실의 다리를 예술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가. 고영직은 백두산, 김정환, 곽재구의 시를 들어 현실주의 시에 대한 몇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변혁적 전망」을 그리는데 다소 성공을 거두었으나 실질적으로 풍성하고 다면적인 인간의 삶을 그러는데는 실제로 실패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 뿐만 아니라 현실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진영의 시인들 모두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현실의 총체적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장편소설의 잇점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소설들은 「짜임새 없는 구성과 낭만적 전망의 극복」을 숙제로 하는 설익는 과일들이었다.

보고문학 차원을 넘지 못한 어딘가 모르게 구성의 치밀하지 못함과 재미없음으로 인한 읽히지 않음은 아직 소설이 현실주의에로 덜 진화되었음을 여실히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시간탓으로 돌리는게 좋겠다.

지금처럼 문제의식만 약화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양이 질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열악한 남한의 연극상황에서 「진보 연극」에 대한 관심과 관중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정수진은 이러한 이유를 경제적 조건의 향상, 통속적 대중문화에 대한 식상, 정치문화퇴조 등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현실주의 연극은 솔찮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삶의 다양성을 표현하지 못했다.

지적한대로 「갈등의 비과학적 해소와 해결전망의 부재」, 극구성의 세련되지 못함을 어느정도 극복한다면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영화는 다른 어떤 공산품보다 안정되고 이윤이 높은 산업이다.

또 그만큼 문화전파력도 커서 혹자는 중세시대 카톨릭교회의 역할을 20세기 소비사회에서는 영화산업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본집약적이고 종속성이 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수공업성과 소집단적 성격을 벗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파업전야」는 영화사상 굵직한 선을 그어 놓았다.

소재도 하나의 충격이지만 창작과 배급에 조직적 성공을 거두고 그 파장을 기성의 영화에까지 올려 주었다.

지루했던「남부군」, 수배중인 운동권 주인공을 다룬 「그들도 우리처럼」, 광주 소재의 「부활의 노래」는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음에도 「파업전야」의 파장에 닿아 있는 것들이라고 본다.

몇가지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추악성과 음모를 다룬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의 과감성도 영화의 현실주의 지평을 넓혔다.

우리는 오윤의 「민중적 힘과 정갈한 형식」의 판화를 기억한다.

그리고 얼마간 비슷한 도식성의 터널에서 서성댔었다.

그렇지만 김봉준·홍성담·민정기·박불똥·임옥상·신학철·오철수에서 이원복, 최성수 그리고 민족미술 진영의 모든 작가군의 판화 유화 걸개그림 등의 양식은 현실을 드러내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낯설음, 그것으로 인한 섬뜩함, 세련되지 못한 기교, 「금속성 이미지」가 걱정스럽기도 했던게 사실이다.

걸개그림은 그 「간결함과 명쾌함」으로 막강한 선동력을 과시한다.

이들은 상징과 표현방법이 상투적임에도 불구하고 「변혁적 현실주의」를 담보한다.

그리고 만화나 포스터, 출판 매체를 통한 다양한 대중 접근 방법도 연구된다.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은 풍자화의 어떤 가능성을 예시해 준다.

임옥상과 신학철 등의 그림이 화랑에서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니 바람직한 현상이다.

음악에 있어서 현실주의는 가사에 그 평가 기준을 의존해 왔다는 박정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음악은 문학이나 다른 예술 못지 않게 대중을 끌고 가는 힘이 막강하다.

그리고 음악은 「어떤 현실에 대한 정보」를 더욱 친밀하게 대중에게 던져줄 수 있다.

현재 불리워지는 현실주의 음악은 「노래라는 장르를 통해」나타나 김민기로 대표되는 70년대, 정태춘으로 대표되는 80년대를 거쳤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나타난 여러 음악운동 단체들의 현실 반영 노래들은 어떤 「매너리즘」에도 불구하고 현실주의 운동에 기여했다.

특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성공은 오래 기억할 만 하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음악적 요소의 생경함을 떨칠 수 없다.

민중의 다양한 경험과 정서틀을 음악화해내는 시도를 통해 대중에게 접근해가야 할 것이다.

계급이나 이념은 순수한 인간을 왜곡시키는 것에 대항하는 하나의 보호막이다.

이 계급과 이념은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종교의 천당이나 지옥설까지도)가 그렇듯 목적을 위해 사물이나 현상을 재고 자르는 방편일 뿐이다.

그러니 계급과 이념은 없고 오직 인간이 있을 뿐이다.

현실의 왜곡된 현상을 인간의 풍성함과 다양한 경험의 축적물인 예술형식으로 공격할 때 진실이란 보물이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진실은 숨어 있는 것을 미덕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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