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국문·09년졸)
문학평론가

소설가 조해진의 단편소설 「문주」는 철로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그이의 이름은 ‘나나’. ‘한국계 프랑스인’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극작가이다. 아마 여기까지만 썼다면 그이의 삶의 내력이 그다지 특출 난다고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이의 이름이 한 가지가 아니라 ‘정문주’, ‘박에스더’ 이렇게 두 개나 더 있더라는 얘기를 전한다면, 왜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럿일 수밖에 없는지 누구나 궁금해질 테다.

여러 이름을 지어준 누군가들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나나 그 자신에게도 이름의 의미가 미궁의 영역에 속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가령 ‘박에스더’란 이름은 프랑스로 입양되기 전 2년 가까이 위탁되었던 고아원에서 지어준 것이라 여기면 그만일지라도, 철로 위에서 발견된 여섯 살 ‘나나’에게 누군가가 지어준 ‘문주’라는 이름의 의미에 관해선 나나 역시도 사는 내내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은 나나의 이력을 취재한 기사를 읽고 다큐멘터리 형식의 단편영화를 찍고 싶다는 ‘서영’의 제안으로 한국에 온 나나가 길을 잃었던 여섯 살 시절의 상황을, 그러니까 나나가 겪은 ‘최초의 헤맴’을 카메라에 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입양한 부모는 나나를 아끼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나는 자신이 단순히 길을 잃어 철로 위를 헤맸던 게 아니라 ‘버려진 상황’이었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했던 것 같다.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문주’라는 이름에 ‘문기둥’이란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이 처음부터 뿌리 뽑힌 존재로 명명되진 않았구나 싶어 안심하다가도, ‘문주’가 ‘먼지’의 한국 동북지역 사투리임을 알았을 때는 자신이 실은 ‘그냥 사라져도 되는’ 존재로 명명된 건가 싶어 금세 마음이 동요하는 나나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아닐까. 누구나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내쳐졌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거기에서 만들어진 고립감은 자신이 왜 사는지, 또는 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조차 희박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나는 자신을 철로 위에서 발견한 후 한 달 정도 데리고 있다가 고아원에 맡겼던 ‘기관사 정’의 흔적과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는 나나에게 문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뿐 아니라, 문주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청량리역에 접수된 아동 실종신고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부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나나에게 밥이나 생과자를 챙겨주었고, 좋은 고아원을 신중하게 알아보기도 했다. 집 안에 눈치를 주는 다른 식구가 있음에도 꿋꿋하게 문주에게 ‘정’이라는 성까지 붙여준 걸 보면 어쩌면 그는 나중에라도 문주를 입양해야겠다 싶어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나는 기관사 정의 흔적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애초에 알고 싶었던 것은 ‘문주’라는 이름의 의미가 아니라 철로에서 발견된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이의 마음 같은 것,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거기로 다가가 손 잡아줄 줄 아는 이의 다정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에 이르게 된다.

나나 혹은 문주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뿐만 아니라 현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모두가 혼자일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간단하게 ‘우리는 모두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를 꺼내려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이름을 가진 어엿한 한 사람으로 있다면, 당신이 현재 당신 곁에 아무도 없거나 당신의 고독을 깨부술 방법은 하나도 없다고 여길 정도로 쓸쓸한 순간을 겪고 있을지라도, 또는 무슨 일을 해도 헛헛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고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삶이 마냥 버겁게만 느껴질지라도, 당신 삶의 어떤 국면에서는 당신을 향해 이름을 지어준 이의 마음 같은 것,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의 안녕을 기원했던 이의 믿음 같은 것이 있어 오늘의 당신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지 간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이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얼굴들을 포함한 채 성립된다. 많은 이들과의 연결 속에서 ‘고유한’ 나 자신이 출현했음을 깨닫는다면 존재론적인 고립이나 결핍, 상처와 같은 것은 오히려 다른 이들과 내가 연결돼 있다는 증거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나’의 목소리로 출발한 소설이 ‘문주’라는 제목으로 지어진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을 막 시작할 무렵의 나는 내 삶의 고유성을 자주 의심했었다. 걸핏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에 위축될 때가 잦았다. 그랬던 배경에는 아마 대학에 오기 전까지 ‘지방’ 출신의 ‘여자’ ‘아이’가 수신했어야 했을 각종 사회적 시선과 규제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살벌한 메시지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대학 시절 내내 나는 내 삶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분투하며 살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자치(自治)’라는 말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다스리는’ 각종 활동을 해나가면서, 강의실에서는 선생님들로부터 그간 내게 문제가 있어서 일어났다고 여겼던 일들이 실은 구조적인 문제였음을 배우면서, 세상에 허투루 대할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눈 맞추는 언어를 고민하는 일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길 위에서는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학문관’에서, ‘십자로’에서, 운동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실감을 주는 활동들은 내게, ‘나’는 많은 이들의 마음과 믿음으로 오늘에 이른 ‘고유한’ ‘사람’이라는 것, 숱한 이들과 연결돼 있는 나는 그러므로 어디에서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삶에 대한 확신은 여러 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나’를 감지할 때 온다는 것도.

‘혼자’는 없다. 고유명사로 마련된 삶을 이어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아직 이름이 불리어지길 기다리는 이라면, 더욱이. 현재 대학을 다니는 후배들이 조금은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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