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논쟁극복 실천성 확보할 때

한편, 정치학계에서는 87년 정치학의 대중화를 목표로 하는 단체로서 한국정치연구회가 설립되어 그동안 개별적으로 진행되어오던 진보적 정치학 연구를 조직의 틀로 묶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구회」라는 것은 진보적 이론의 대중적 확산이라는 면에서는 상당한 의의가 있으나 방대한 연구자 단체인만큼 연구의 효율성과 집중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연구회의 이런 조직적 한계를 인식한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 시기에 또한 각 분야별로 새로운 위상의 연구소 설립이 활발히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사회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구로역사연구소,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구소 등이다.

한국사회연구소는 88년 한국사회성격에 대한 논쟁이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에 반기를 들고 「한국사회의 현상에 대한 실증적·경험적 연구를 통해 구체적 대안을 개발한다」는 새로운 위상을 내걸고 창립되었다.

현재는 50여명의 회원이 소속되어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세·시사 분석 등의 연구를 수행, 그 연구성과물은 「동향과 전망」을 통해 대중에게 보급되고 있다.

역사문제 연구소는 지난 86년 연구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연구소」의 위상을 갖고 설립되어 이전까지는 역사연구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근·현대사 영역에 주로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지난 89년부터는 상임연구원제를 실시, 이 연구원을 중심으로 연구를 더욱 활성화시키고 있으며, 연구의 성과물은 계간지 「역사비평」으로 외화시켜 학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88년 민족해방운동사의 체계적·과학적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현재는 「연구자와 민중과의 접촉 공간을 확대해 그 속에서 연구자의 실천성을 확보한다」는 취지하에 일반대중에 대한 역사강좌 등 대중사업을 많이 벌이고 있다.

이상의 현황에서 볼 때 현단계 인문·사회과학분야의 학술운동은 전단계에 비해 발전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현 수준에서 지닐 수 밖에 없는 모순과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인문·사회과학분야 학술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 각 연구소에서 내놓는 연구성과물들이 사실상 그 검증통로가 없어 현단계 운동에서 검증받지 못하고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으로만 그친다는 것이다.

이는 연구자 개인의 연구주의적 경향성에도 상당부분 기인하는 것으로, 연구자들이 연구단체 건립 초기의 위상과는 달리 점차로 「연구를 위한 연구」에 매몰되면서 대중운동과 학술운동의 이분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런 학술운동의 연구주의적·기능주의적 편향성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이론성과 실천성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연구자 개인의 노력과 함께 연구자들의 이론이 현실에서 검증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통로 마련이 시급하다.

이는 이론이 실천을 통해 꾸준히 수정받음으로써 보다 더 견고하게 다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전민련 산하 연구단체인 민족민주운동연구소는 전민련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를 수행, 검증받으면서 새로운 이론을 세워나간다.

이것은 이론이 상위단첸에 귀속, 편협될 우려를 안고 있음에도 전체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학술운동의 위상을 생각할 때 고려해 볼 만 하다.

두번째 문제점으로는 구체적 연구성과의 부족을 들 수 있다.

87년 이후 수십여개의 재야 연구단체들이 꾸준히 연구를 진행시켜왔음에도 그동안의 연구가 사실상 변혁운동진영의 과학적 무기가 될만한 이론과 정책적 대안을 수립하지 못하고 각 사안에 대한 임기응변식의 대처였다는 비판이 높다.

이는 연구자들의 분파적·소비적 논쟁과 각 연구소의 연구가 상호연관을 갖지 못하고 분산적으로만 수행되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의 개선을 위해서는 연구소들이 지금까지의 분파성을 극복하고 연계를 맺어 공동연구를 진행함으로써 개별 연구시각이 갖기쉬운 편견과 오류를 지양하고 이론의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또 분산적으로 진행되는 연구 역시 총화시킬 수 있는 장을 마련, 그 성과가 더욱 심화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덧붙여 거의 모든 연구소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재정부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소들은 그 재정을 연구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하기 때문에 장기적 안목의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이는 다시 「실질적 연구성과물의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아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각 연구소와 연구주체의 연구역량강화로 능동적·현실적 대안을 가진 이론을 창출, 이를 매개로 재야단체의 지원을 받거나 출판물·대중강의를 통한 연구 재생산의 기반을 마련하는 길 밖에 없다.

이런 학술운동의 문제점을 조직적으로 해결하고 연구자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가 지난 89년 설립되어 지금까지 2회의 공동 심포지움과 공동연구사업을 추진하는 등, 학술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협의체 수준의 한계와 하부단체들의 학단협에 대한 인식과 참여부족 등으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현재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술운동의 문제는 결국 연구자 주체와 연구자 조직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소련·동구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민족민주운동진영의 침체로 이에 대응해야 할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에 서게 된 인문·사회과학분야 학술운동이 「변혁운동의 과학적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자 위상의 재정립과 힘있는 연구자 조직 건설에 매진, 실천을 통한 민중성 획득에 힘찬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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