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노래가 생명력을 잃고, 광장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그래도 힘을 내고 싶었다. 힘을 내려면 실패가 무의미하지 않아야 한다. 이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 그걸 어떻게 가장 정확하게 언어화할 수 있을지 아등바등했다. 그 순간 문득,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려운 길을 피해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수험시절, 나는 많이 아팠고 온 세상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만약에 쟤만 대학에 붙고 나는 떨어지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에 친구 하나도 온 마음을 맡기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곁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믿을 수 있고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해도 괜찮은 공동체를 갈망해왔다. 나는 그 공동체의 가능성을 광장에서 깃발을 들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해주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서 처음으로 느꼈다. 그 순간이 나의 세계를 온통 새로운 색깔로 물들였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각자의 상처를 가진 소수인 우리들이 세상의 진실을 보았을 때 모두가 될 수 있다고, 우리가 서로를 믿고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 세상까지 바꿀 수 있다고 더 믿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이를 위한 요구는, 없다. 어떤 그늘도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것도 없게 하는 것뿐이다. 아무 그늘도 없는 세상은 사막일 뿐이다. 누구도 동하게 할 수 없고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나의 위치와 경험을 가지고 ‘인문학 필수교양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희망했다. 그 희망에 따라 주장을 하고 사람을 모으고 설득했다. 그 말에 응답해준 학우들에 의해 구호가 교육받을 권리, 교육을 결정해나갈 권리라는 의미를 부여받았다. 

내가 이화인 1000인집회에서 잘한 점과 더 잘했어야 했던 점을 망라해 가장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모두를 위한 주장은 없다. 하지만 모두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교과개편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불완전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강사법과 정부지원사업이라는 맥락에서 하나의 구호로 떠올랐을 뿐이다. 주장이 흐르지 않고 타성에 젖을 때 이는 오히려 학생들의 선택권을 좁히는 구호가 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과개편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넘어 그것을 꿰뚫는,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마음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단지 몇 달 동안 문제를 제기하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교육받을 권리, 강사선생님을 비롯한 우리의 동료 구성원의 삶이라는 문제,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학생들의 관심에 있어야 한다. 

기억은 이어지고, 삶도 계속된다. 광장에 있었던 한 명 한 명이 이걸 어떤 경험으로 받아들일지, 그래서 미래에 어떤 일을 촉발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1000명이 아닌 400명이 모였다 하여 9월 25일의 기억을 실패라는 간편한 단어로만 환원하는 것은 나의 무능일 따름이다. 미래의 어떤 이들의 치열한 고민과 실천에 의하여, 2019년 9월 25일은 실패라는 단어보다 더 길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다시 말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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