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혜 동문
전지혜(의류직물‧11년졸) '책방, 생활의 지혜' 대표

책방을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책방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나’와 ‘책에 관련된 전공을 했거나 일을 했었나’이다. 다독가도 아니고, 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면 책방지기 자격 유무를 운운하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책방 운영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내가 생각해도 내 스펙은 탈락이 분명하다.

고백한 김에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책 읽는 즐거움을 모르는 아이였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바빴던 우리 부모님은 집에서 독서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고, 자연히 나도 가정에서 독서를 생활화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학교에서 접한 책이라고는 필독 도서뿐이었기 때문에 학창시절 내게 독서란 지루한 글을 억지로 읽어내는 것이었다.

비로소 내가 읽는 사람이 된 것은 대학 3학년 교환학생 시절 일어난 일이다. 부푼 기대를 안고 떠났지만, 캘리포니아 작은 대학도시에서의 생활은 때때로 우울했고 대체로 사무치게 외로웠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매일 밤 싸구려 나파밸리 와인을 홀짝이며, 인생에 대한 한탄이나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을 글로 끄적거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근처 대도시에서 먼저 유학하던 친구를 한 번씩 만나는 게 낙이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한국에서 받은 책을 한 권 줬다. 보통의 나였다면 사양했겠지만 일단 오랜만에 보는 한글 텍스트가 정말 반가웠고, 그 시절 내겐 남는 게 시간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 들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과 잊을 수 없는 첫 경험을 했다. 나도 설명하기 어려워 답답했던 내 감정이 작가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일면식도 없는, 나보다 40살이나 많은, 지구 반대편 남미 출신의 남성 작가가, 그러니까 나랑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는 그 작가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고 있는지.

더 놀라웠던 것은 내 감정이 그의 언어로 정리되고 나니 바람 잘 날 없던 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도래한 것이다. 종교가 없었던 나에게 이것은 마치 ‘모세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책은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이었다.

이 경험은 나중에 또 다른 책을 읽으면서 설명 받을 수 있었다. “마음의 불안을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할 수만 있어도 위안이 됩니다.”―「당신이라는 안정제」(김동영·김병수 저, 달출판사)

전지혜 대표가 본교 앞 52번가에서 운영 중인 '책방, 생활의 지혜'.
전지혜 대표가 본교 앞 52번가에서 운영 중인 '책방, 생활의 지혜'.

그리고 지금까지 삶의 한 축을 책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그동안 나는 책을 통해 내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고, 작가의 언어를 체득해 나를 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에게 갇혀 있었던 내가 타인에게 또 세상으로 점점 나를 확장해나갈 수 있었던 것도 책의 힘이 크다. 멀리는 니체나 가까이는 황현산 선생님처럼 나보다 먼저 삶을 지나온 작가들이 남기고 간 지혜를 얻기도 하고, 김영하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거나 주변인이 되어보면서 현실보다 독한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말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직업을 바꾸고, 또 회사를 바꾸고, 삶의 여러 갈래 길을 지나서 다시 학교 앞으로 돌아와 책방을 열기까지. 내 모습은 계속 바뀌었지만 읽는 사람이었던 것은 변함없었다. 그게 책방주인으로서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스펙이다. 유일하지만 충분한 조건이라고 믿고 싶다.

인생에서 조금 더 일찍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지 자주 생각한다. 삶에 대해 막연하게 한탄하고 걱정하느라 보낸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이 언제나 인생에 명쾌한 해답을 줬던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생겨나는 걱정거리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서 늘 방향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취미 칸에 ‘독서’를 쓰는 이가 드문 요즘, 더 많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빨리 책이라는 작은 기적을 만났으면 좋겠다. 내가 책방을 연 건 책에 둘러싸인 직업을 갖고 싶었던 개인적인 소원성취를 위해서였지만, 책방 운영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더 많은 ‘읽는 사람’을, 더 나아가 모두가 ‘읽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명감이다.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좋다. 꾸준히 조금씩 읽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기 바라며, 누군가 이곳에서 책이 주는 기쁨을 찾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이 작은 책방을 지킨다.

전지혜 대표

 

*2006년 본교 의류직물학과에 입학해 광고홍보학을 복수전공하고 미술사학을 부전공했다. 졸업 후 홍보대행사에 재직하다 퇴사하고, 이후 외국계 의류무역회사에 재취업해 6년 간 테크니컬 디자이너(TD)로 일했다. ‘회사’가 아닌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직장인 생활을 관뒀다. 2018년 6월부터 본교 앞 52번가에서 <책방, 생활의 지혜>라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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