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불문·65년졸) 소설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굳건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의연하게 생명을 이어오는 나무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의 힘이라는 것을.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 해도 악착같이 뿌리를 뻗어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뿌리가 약한 식물은 예쁜 꽃을 피워도 일년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나무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모진 시련이 닥쳐와도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종류의 책, 그 중에서도 특히 소설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알렉산드르 듀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면서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시작됐다. 듣도 보도 못한 프랑스의 정치, 사회, 풍습, 인간들의 삶이 소설 속에 생생하게 담겨있음에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사춘기 소녀였을 때 읽은 프랑소와즈 사강(Francoise Sagau)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첫 문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우울함과 다정함이 맞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낯선 감정에 슬픔이라는 무겁고 훌륭한 이름을 붙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이고 있다” 라는 첫 문장에 그만 정신없이 매료됐다. 청춘이 가진 잔혹함과 냉소, 암담한 허무감이 배어 있는 소설이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등과 우리나라 작가들의 놀라운 작품들을 이곳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길고 긴 소설을 읽는 즐거움 속에 나는 시간과 열정을 다 바쳤다. 책 속에는 무궁무진한 지식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책을 읽다보면 글자들이 살아서 움직이며 뇌를 통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감동에 휩싸이곤 한다. 그때마다 독특한 글의 마력 속으로 빠져드는 몰입의 경지를 통해서 가슴 속 깊이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

내가 책만큼이나 좋아하는 영화는 즉석에서 생생한 감동을 주지만, 이미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나에게 깊은 사고와 함께 상상력과 창의력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결혼해 아이까지 다 낳고 우연히 신인작품상에 응모해 느닷없이 소설가가 된 것도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열광하며 읽었던 책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습작도 없이 작가가 된 나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글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서 밤을 새우며 소설을 쓰곤 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 어디에 숨어 있다가 뒤늦게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지 나 자신도 그저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종류의 책이든 독서는 우리들의 두뇌를 위한 식량과도 같다. 미래의 자신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동안 읽은 책의 양과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결국 혼자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때 책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깨달음의 뿌리를 키워나간다면 삶은 더욱 깊어지고 강인해질 것이다.

학생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보다 찬란한 미래를 꿈꾼다면, 무한한 지식을 안겨주는 책 속에서 상상력과 창의력과 판단력과 총체적인 인내심을 기르기 바란다. 아무리 첨단기기가 발달해서 쉽고 넓게 지식을 습득하는 시대라 해도,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성장하는 힘은, 온전히 책을 통해 자신만이 터득해야 할 일이기에.

김선주 소설가

 

*본교 불어불문학과를 1965년에 졸업했다. 단편소설 「갈증」으로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윤동주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최우수작가상, 펜문학상, 이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는 「유리벽 저쪽」, 「그대 뒤에서 꽃 지다」, 「송자소전」, 「길 위에 서면 나그네가 된다」, 「파라도」, 「꽃비 내리다」, 「미친 해바라기」 등과 다수의 수필, 콩트집이 있다. (사)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사)한국문협 소설분과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문화콘텐츠21 대표,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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