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정에 선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고소당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말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진실한 가르침’을 주었을 뿐이다. 가르침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가 가난하다는 것이 바로 ‘진실한 가르침’의 증거이다. 진실한 가르침에는 대가가 있을 수 없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진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에나프의 「진리의 가격」은 소크라테스의 이 변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의 존재 가능성, 어느 경우에도 사고 팔 수 없는 재화들의 문제”를 추적한다. 아테네 거리에서 ‘값없이’ 진리를 가르치던 소크라테스의 시대로부터 2400년이 흐른 후, 거의 모든 것에 값이 매겨지고, 거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을 가르치던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며, 오늘날 대학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한다. 지식 전수? 유능한 전문인을 길러내기 위한 훈련? 미래사회에 적합한 인재 양성? 오늘날 표방되는 이런 목표들은 값을 따질 수 있는, 값어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엄지세대,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미셸 세르는 두뇌의 일부분을 손에 들고 다니는 신인류, ‘엄지세대’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대학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는 것 같다. “이제 지식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그것을 어떻게 전수하느냐고? 그 문제도 고민할 필요 없다. 이미 전수되고 있으니까.” 디지털 단말기와 인터넷이 지식을 개방했다. 강의실에서의 낡은 지식 전수 방법은 이제 불필요하다. 교수가 앞에서 떠들고 학생들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그런 공간은 “점차 희석되고 한적해진다.” 실제로 지금 교실에서 교수의 목소리는 엄지세대의 손에 들린 하이테크놀로지와 싸우고 있다.

하이테크놀로지가 요구하는 변화를 직시하면서 대학이 값어치 있는 것들을 하고자 애쓰는 이유는, 대학을 벗어나면 모든 것에 값이 매겨지고 거래되고 교환되는 냉혹한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살아남기 위한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고, 개인이 가진 자질, 능력, 가능성은 값이 매겨져 평가된다. ‘대학을 벗어나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은 없다. 대학도 값이 매겨져 평가를 받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하는 한, 그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에나프의 「진리의 가격」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의 존재 가능성, 사고 팔 수 없는 가치를 보존하는 행위로 ‘증여’를 고려한다. 등가교환을 뛰어넘는 이 놀라운 행위가 담는 선의는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을 보존한다. 이 행위는,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에게 존중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존중할 만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 행위에서 교환되는 것은 ‘관대함, 영광, 명예’ 같은 것들이다. 

세르는 디지털 단말기와 인터넷이 지식을 개방한다고 했지만, 거기에서 개방되는 것이 지식일까? 무한한 정보에로의 접근 가능성이 바로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그것을 구성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보다 높은 지성적 능력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대학의 강의실은 여전히 의미 있는 가르침의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공간은 단지 지식 전수에 한정되지 않는, 구성원들 사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함께 보존해야 한다. 대학이 지켜야할 것, 그것은 등가교환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쟁으로 잠식되지 않는, 선의와 관대함과 명예와 품위, 그것에서 기반 한 타인과 자신에 대한 존중을 보존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것은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일 뿐.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