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재단의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사회 저명인사의 성공 스토리를 들었고, 꿈과 목표와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수여식답게 마무리가 될 때 쯤 장학금 수여자들의 자신의 꿈에 대한 3분 연설이 진행됐다. 나를 포함한 수여자들은 본인이 어떤 활동을 해왔으며, 어떤 꿈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당당하게 얘기했다. 국회의원, 사회적 기업인, 수의사 등 미래의 사회 리더들이 모인 자리였다.

화려한 꿈 연설들이 이어졌고 내 순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고등학생 수여자가 단상에 올랐다. 그는 움츠러든 몸짓과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직 꿈을 못 정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연설을 듣고 많이 반성했습니다. 다들 너무 멋있는 분들 이셔서.. 저도 어서 빨리 꿈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누가 내 머리를 한 대 친 느낌이었다. 잔뜩 겁먹은 그를 보며 학창시절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이 그렇듯, 학창시절 내가 아는 세상은 학교가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 작은 세상에서 사회로 옮길 준비를 해야 했고, 아직 내가 언제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는데 큰 세상에 가려면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대학에 갈 수 있다고. 그 작은 세상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선생님이었기에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내 꿈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내 대외용 꿈이 설정됐고, 이를 위해 3년을 치열하게 보냈다.

현재 나는 완전히 다른 길에 서있다. 막상 학교를 벗어나니 세상은 너무 넓었고, 이곳에서 진짜 꿈을 찾기 위해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학창시절 사람들이 어서 꿈을 찾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더 넓은 세상을 더 빨리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빨리 남들처럼 꿈을 찾아야한다는 조급함은 한창 진로를 탐색해야할 시기에 오히려 내 시야를 좁혔다.

꿈과 목표를 찾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내일을 살기위해 우리에게 목표는 필연적이다. 다시 말하면 내일의 목표의 부재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는 뜻이고, 이는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뒤처지고 있다는 걱정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다시 돌아가서, 짧았던 그 학생의 연설이 끝나자 비로소 꿈과 목표로 가득했던 그 수여식이 그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을지 참 안쓰러웠다. ‘꿈이 무엇이니?’라는 질문은 당연히 꿈이 있을 거란 추측을 내포하고, 더 나아가 나이 등의 권력을 가진 자의 질문은 상대방에게 꿈이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된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단상에 올라 꿈을 강요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좋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돈 받아가는 주제에 분위기 파악도 못 한다고 사람들이 속닥거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을 포함한 어른들이 한번쯤 그 이유를 생각해보길 바랐다. 그리고 그 학생의 목소리가 얼마나 작았는지 그들이 귀 기울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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