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이화인들의 지성과 정서 함양, 풍부한 독서 문화를 위해 도서 추천 에세이를 연재한다. 교내 교수뿐만 아니라 이화 출신 명사(名士) 등이 직접 쓴 도서 추천 에세이는 이번 주부터 매주 실릴 예정이다. 그 첫 주자는 정끝별 교수(국어국문학과). 정끝별 교수는 대학교수이자 시인으로, 그의 시 ‘저린 사랑’은 올해 수능특강에 실리기도 했다.

정끝별 국어국문학과 교수·시인

책의 시대가 가고 TV의 시대도 가고 있고 유튜브의 시대가 왔다. 인간의 시대가 가고 연애의 시대도 가고 있고 펫의 시대가 왔다. 대학생이 된 딸아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유기된 아기고양이 입양이었다. 고양이를 안고 유튜브 속 냥이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딸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다. 최근 발매된 한 아티스트의 노래 제목이 ‘나만 없어 고양이’(2017)다. 최근 출간된 책 제목 또한 「나만 없어, 댕댕이」다. 스펙, 애인, 직장, 결혼, 집, 아이를 차례로 포기하고 혼자 있을 작은 방과 (사람 손을 덜 타는) 고양이가 로망이 된 젊은이들의 현실이 묻어나는 제목들이다. 그러니 “고양이도 없어”는 세상 온갖 상실감이 압축된 한 마디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대학생들의 낮은 자존감, 불안감, 우울감, 강박증, 공황장애 등의 심리적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담론을 자주 접한다. ‘닥치고’ 행복해야 할 학생이란 신분이 감당해야 하는 불안이 주는 무게는 녹록치 않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SKY 캐슬’(2018)이 우리의 초중고 12년을 압축해 보여준 바 있다. 미성년을 올인해 힘겹게 입학한 대학은 어떤가?

자유, 정의, 진리, 낭만, 꿈은 실종된 지 오래. 취업은 커니와 졸업이수 조건에 맞춰 성공적인(!) 학점을 받고 학위를 취득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 수 페이지에 달하는 같은 포맷의 강의계획서마다 적시된 교재와 과제, 시험과 평가방식은 너무 다채롭고 또 많다. 각 과목마다 지정한 규칙과 규정들은 또 어떤가. 이를 어겼을 때 돌아오는 결과는 혹독하기에 그 세세한 내용과 타임라인을 다 기억해야 한다. 이런 과목들을 매학기 네다섯 개 이상을 들어야 한다. 게다가 최소한의 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크든 작든 알바를 해야 한다면? 

미래에 대한 과도한 불안, 경쟁에 따른 인간관계의 상실, 경제적 어려움, 무분별한 스펙 쌓기에 대한 피로, 자존감의 부족이 어디 대학생만의 문제겠는가. 밥벌이의 사회는 정글 아니 지옥이라 하지 않는가. 무한경쟁에 내몰린 우리 모두가 심리적 취약성과 정신건강의 위기에 시달리고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타, 괜찮타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돌아보게 하고 다시 세워 나아가게 하는 것이 내게는 독서고, 시다.

작년 말에 번역 출간된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는 내게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에세이 시대에 부합하듯, 잡학 다식할 정도로 지적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인생경험과 예술적 감성을 자랑하는 맛깔난 글 솜씨가 일품이다. 50대 후반의 이 여성저자는 1980년대부터 환경, 반핵, 인권 방면으로 다양한 현장운동에 참여해온 저술가, 비평가, 역사가, 여권운동가다. 각 방면에서 메시지 강한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저서 또한 많다. 2005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저자의 여성적 정체성, 역사와 사회문화에 대한 첨예한 인식,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감수성이 풍요롭게 어우러져 있다. 시적인 에세이인가 싶으면 소설 같고, 철학서인가 싶으면 역사사회과학서 아니 예술대중문화서 같다. 저자가 경험한 인생 이야기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길 잃기 안내서」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는, 길 잃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제발 길을 좀 잃으면서 살아라, 라고 권면한다. ‘기승전’ 길을 잃고서야 얻게 되는 기쁨, 그 이상하고 야릇하고 완전한 기쁨을 찬양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스스로를 ‘쓰담쓰담’하며 불안한 미래에 대한 위안과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 애초에 길이란 게 정해져 있지 않으니 길이란 잃는 게 아니구나, 그러니 내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길이고 길이란 그렇게 가면서 만나지고 만들어가는 것이구나,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멀리 간다,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그런 여행은 분명 낯설고 설레고 그만큼 더 힘들고 더 기쁠 것이다. 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구동성의 땃쥐들처럼 모두가 한길로 몰려드는 그 길만이 길이 아니라, 내가 가보고 싶고 갈 수 있고 즐겁게 가고 있는 지금 이 길이 바로 내 길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솔닛은 말한다.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라고.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는 일이 바로 길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예술가, 혁명가, 철학자, 탐험가, 모험가. 사랑꾼, 그리고 진정한 젊은이들이야말로 길 잃기에 유능하고 능숙한 자들이다. 뭔가에 빠지기 시작하고 몰두하기 시작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편재(遍在)한 불확실성과 미스터리, 의문을 수용할 줄 아는 그 소극적 능력이 바로 문학적 아니 인문학적 능력이 아니겠는가.

‘내 길이 따로 있겠어’라는 절망에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길이 안 보인다고 불안해할 때, 길을 잃었다고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길을 쫓아갈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 그때 이 「길 잃기 안내서」를 펼쳐보시길. 천천히 가도 괜찮아, 달라도 괜,찮,아,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 뚜벅뚜벅 다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길은 분명 새로운 길일 것이다. 그러니 길 잃기란 바로 원래의 길이나 아예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시작임이 틀림없다.

정끝별 국어국문학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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