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 혐애, 명예남성... 논쟁은 구체적이고 적확한 말들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다양한 페미니즘 의제들에 대한 생각이 하나로 묶이지 않고 내 안에서 부유하기만 했다.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 토론을 미뤄왔지만, 이제는 모두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어 글을 쓴다. 

많은 학우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지만 머리가 길고 화장을 한 여성들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실제로 머리가 갈고 화장을 한 여성들이 머리가 짧고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부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안타까움과 부채감은 필연적으로,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태어나자마자 페미니스트인 사람은 없고, 페미니스트로 자기 자신을 정체화해도 페미니즘 실천에는 끝이 없으며,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삶을 살았던 페미니스트들의 헌신에 발딛고 서있기 때문이다. 즉 페미니즘에 헌신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여성들을 안타까워하려면, 페미니즘을 몰랐던 과거의 자신과 페미니즘을 배우고 있지만 완벽한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한 지금의 자신도 싫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의 나에게서 죄책감을 더는 방법은 페미니즘 실천의 최전선을 설정하여 헌신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의 최전선이라는 말이 매우 공허하게 느껴진다. 최전선은 도대체 어디이며 누가 최전선에 설 수 있는가?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 대학생이 최전선인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 여자 아이돌이 최전선인가? 회사에서 출세한 고학력 여성이 최전선인가?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해야 했던 가정주부가 최전선인가? 페미니즘을 말하면 생계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비정규직 빈곤층 여성이 최전선인가? 누가 최전선이며 누가 프리라이더인가? 사실 이 모든 여성들은 부분적으로 나 자신에게 반사되어 돌아온다. 이들은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해준 여성이기도 하며, 나였던 여성이기도 하고, 내가 앞으로 될 수 있는 여성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 논의를 적극적으로 비약해서 이 모든 여성들이 나 자신이라고 감히 말해보겠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나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페미니즘을 넘어서자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의 안타까웠던 나 자신까지 책임지고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가 되자고 말하고 싶다. 여성인권에 대해 말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내가 일구어낸 성과를 명예남성들에게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의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것, 괜찮다고 충분히 잘해왔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손잡아 주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 부득이하게 이 글에서 여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여성이라는 표현이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을 비가시화하는 맥락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