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기자

내 나이 마흔 셋. 불혹을 넘긴 나이에 생각지도 못했던 늦둥이가 생겼습니다. 큰 아이와는 무려 열 살 차. 아무런 기대도, 계획도 없던 저에게 하나님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습니다. 이 아이, 신고식도 요란했습니다. 뱃속에 들어선지 6개월 즈음 급성 빈혈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저 또한 임신성 당뇨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 노산의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습니다. 만삭까지 회사에 나갈 거라고 소리치던 호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저는 병가를 시작으로 출산휴가에 육아휴직까지 1년간의 긴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KBS 기자로 입사한 지 올해로 18년차. 대학 시절 김은혜, 김주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뒤를 잇겠다며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7전8기 끝에 KBS에 합격해 사회부, 국제부, 문화부, 경제부까지 취재 부서를 두루 누볐고 치열한 사내 오디션 끝에 꿈에 그리던 뉴스 앵커석에도 앉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사회부 수습기자 시절 경찰서에서 먹고 자는 일명 ‘하리꼬미’. 일주일 동안 씻지를 못해 소위 ‘떡진’ 머리로 사건 현장을 누비면서도, 하루 2~3시간 새우잠을 자면서도, 눈에 불을 켜고 사건을 쫓던 그때의 열정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나 지금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한 달간 경찰서 합숙 (?) 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집에 돌아간 날, 문밖에 마중 나와 있던 엄마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합니다. 앵커로 데뷔하던 날, KBS 건물 외벽에 걸린 제 뉴스 포스터를 배경으로 엄마 아빠와 사진을 찍었던 가슴 벅찬 추억도 아련합니다.

결혼과 출산은 기자 생활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아침 6시 출근 밤 10시 퇴근하는 최악의 근무 여건 속에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기란 감당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직장 여성 五福 중 하나라는 아줌마 복은 타고나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있었던 건 제 삶에 주어진 가장 큰 축복으로 꼽습니다. 기자로도 앵커로도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던 제가 토론프로그램 사회자로 발탁된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적에 가깝습니다. 뜨겁게 찬반양론이 펼쳐지던 숨 막히는 2시간. 어디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저 스스로 균형을 지키며 토론을 끌어가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들. ‘워커홀릭’이란 말까지 들으며 여기자로 살아온 지난 18년... 그런 내게 혜성처럼 찾아온 늦둥이는 ‘제발, 잠시만 쉬어가라’고 속삭이듯 제 삶에 따뜻한 쉼표를 찍어주었습니다.

오늘로 복직한지 꼭 2주째. 다시 옷장에서 정장을 꺼내 입습니다. 로션도 바르지 않던 나의 생얼은 다시 풀메(풀메이크업)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카메라 앞에 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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