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은 한 권 뿐이다. 전해지는 <시학>의 6장은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 관해서 논의해보자”며 글을 시작한다. 허나 그 끝인 26장에 달할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언급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시학> 2권이 존재하며, 2권에서는 희극에 대해 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시학> 2권은 언제 어디서 왜 소멸됐을까? 그 질문에 대한 상상으로 ‘장미의 이름’(1986)이라는 소설과 동명의 영화가 탄생하게 된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파의 수도원에 도착한 윌리엄과 그의 제자 아드조는 그 곳에서 수도사들이 죽어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건을 추리하던 윌리엄은 한 권의 금서와 죽음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수도원에서는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두 수도승과 소녀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화형을 앞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윌리엄과 아드조가 금서를 찾으러 서고에 갔을 때 마주친 것은 원로 수도사 호르헤다. 호르헤가 지금껏 금서의 유출을 막기 위해 페이지마다 독을 발라놓은 것이었다. 그 금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다.

<시학> 2권을 금서로 지정한 건 변화를 두려워한 자들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14세기, 이미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기 직전의 시점이다. 인간을 배제한 중세의 기독교적 가치가 몰락해가고 인간의 감정과 지성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급부상하던 때. 논리적 결함으로 무너져가던 중세의 가치는 비극 즉 엄숙함으로 간신히 권위를 지켜나고 있었다. 희극이라는 개념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기독교적 가치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 자명했다. 인간의 주체적 사고와 웃음이 결합한다면 자연스레 풍자와 비판, 비웃음이 가능해지며 이 재미있는 것들은 엄숙함보다도 훨씬 전염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매 페이지마다 독을 바르고, 결국엔 책을 씹어 먹으며 서고에 불까지 지르는 호르헤의 광기어린 아집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생각과 감정을 모른 채 짐승처럼 살아가던 민중은 무고한 이들이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결국 이들은 돌멩이를 집어 들었고 무고한 자에게 화형을 선고한 심판관을 응징한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해피엔딩이 아닌가 싶겠지만, 실제로 학계에서는 15세기부터를 르네상스로 분류한다. 중세의 몰락을 막기 위한 교인들의 마지막 발악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세상이 변하고 있었고, 영화는 그걸 반영해 약간의 상상력을 보탰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참으로 간단명료하다. 썩고 썩은 시대는 현상을 유지코자 하는 기득권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시대는 반드시 온다는 것. 때로는 그 변화가 지나치게 거시적이라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분명히 변화하고 있기는 하다는 것. 그러니 우리 모두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록탑을 쓰는 2018년 10월5일,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던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15년형이 선고됐다. 최종범 사건으로 영원히 외면당할 것만 같던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 처음으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성에 차지는 않는다만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하나 싶어 마음이 편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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