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

  통학을 위해 올라탄 지하철에서 마주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새겨진 이 문구는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분명 이 좌석의 존재 이유는 교통약자인 임산부를 위해 비워두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좌석 위 문구에서 칭하는 ‘내일의 주인공’은 지금 그 자리에서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임산부가 아닌, 앞으로 태어난 뱃속 태아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된다. 짧은 문구지만 임산부는 이로 인해 타자화된다. 산부 스스로 좌석에 앉을 ‘권리’를 지니는 것이 아닌 뱃속의 태아의 존재 덕에 배려받는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자 ‘배려석’이라는 단어에 문제는 없을까? 타인을 도와주거나 보살피기 위해 마음을 쓴다는 ‘배려(配慮)’의 주체는 ‘베푸는 사람’이다. 따라서 ‘배려석’이라는 단어는 임산부가 아닌 사람들에게 임산부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줄 ‘권리’를 쥐어준다. 이렇게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는 당연한 행위가 아닌 베푸는 행위가 된다. 임산부들은 배려받는 타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마련된 좌석에 앉지 못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배려는 주체의 선의에 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려석이 임산부들의 대중교통 이용 상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본 의도를 찾으려면 ‘배려석’이라는 명칭을 ‘권리석’으로 바꾸는 것이 맞다. 실제 이용 주체인 임산부들이 당연하게 좌석에 앉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핑크카펫’ 앞에서 타자가 되는 임산부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도 통학을 위해 지하철을 오른다. 시선은 또 핑크색 그 좌석을 향한다. ‘배려석’인 그곳은 ‘오면 비켜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의미가 가려져 있다. 그 좌석의 이름이 ‘배려석’인 한, 언제까지나 우리는 그곳을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배려’는 주체의 논리에서 선의를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좌석을 이용하는 진정한 주체인 임산부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석’은 ‘권리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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