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정체성 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보자

  선생님, 김소월이 여자가 아니에요?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국어를 관심 있게 배웠던 학생이었다면 한 번쯤 들었던 의문일 것이다. 소월은 얼핏 봐도 여자 이름인데다 그의 시를 여성적 어조로 설명하는 참고서 해제가 많기 때문이다. 국어 과외를 하며 3번 정도 받은 질문이라 응. 본명은 김정식이야. 라고 대답해줬다. 그런데 뒤이어 물어오는 학생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왜요? 왜 김소월인데요?


  집에 가서 찾아보니 소월은 한자로 素月, 흰 달을 의미한다. 유년 시절 남산골에서 달맞이를 즐겨했던 그는 자신의 호를 소월로 지었다. 실제로 그의 시를 보면 달을 시상으로 한 작품들도 많다. 흰 달이 갖는 애상과 서정이 소월의 시 속에 잘 묻어나 있다. 흰 빛으로 서정을 노래하던 그는 서른 두 살의 짧은 나이로 요절하여 달처럼 으스러졌다.


  필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이육사일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 부여받은 죄수번호 264를 그대로 필명으로 삼아 작품을 발표한 그의 본명은 이활이다. 그는 의열단에 가입해 직접적인 항일무력투쟁을 벌인 기개 넘치는 애국지사였다. 죄수번호를 오히려 작가의 정체성인 필명으로 삼은 것은 ‘죄수’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겠다는 그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이름 속에 자신의 시적 의지를 오롯이 담은 것은 <노동의 새벽>으로 유명한 박노해다. 그의 본명은 박기평으로 박해받는 노동자(勞)의 해방(解)의 앞글자를 따서 필명을 지었다. 독재정권이 지배논리가 되어 노동자의 권리가 보이지 않던 시절, 얼굴 없는 시인으로 활동한 그는 철저히 노동자의 눈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려냈으며 실제로도 노동해방의 최전선에서 투쟁의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의 삶 자체가 그 이름의 화신(化身)이었다.


  이처럼 어떠한 시를 감상할 때, 작가의 이름에 드러난 의미를 인지하면 훨씬 더 풍부한 작품 감상이 가능하다.이름은 작가의 시 세계, 그리고 작품 너머 삶 자체도 품고 있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소월, 육사, 노해는 모두 그의 필명 속에 시의 주제가 집약되어있다. 모두 작가들 자신이 주체적으로 삼은 필명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라는 등식은 삶의 어느 곳에나 성립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쓰이는 이름은 선천적으로 생명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부모님 혹은 작명소에서부터 부여받는 나의 이름은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삶을 단정 짓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꼭 글을 창작하는 작가가 아니어도 괜찮다. 이름은 평생 남으로부터 불리는 나 자신의 공명이며 죽어서도 족적으로 남을 삶의 흔적이다. 결국 이름은 영원한 나의 자기정체성의 발현인 것이다. 이번 기회에 직접 나의 이름을 지어보는 것이 어떨까. 나의 삶의 태도, 나의 시대정신을 담는 이름을 짓는 행위는 곧 내안의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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