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2월 27일 구한 말에 태어나 일제시대, 4·19, 5·16, 군사정부 개발 독재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 살다간 김활란 박사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평가는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을 거듭하고 잇다.

특히 김활란 박사를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보는 상제정론자, 친일여성으로 보는 상철회론자의 평가는 동일 인물에 대한 평가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양 극단을 달리고 잇다.

우선 우월 자신은 기도중에 “저 소리가 들리느냐? 저것은 한국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잇을 수 잇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에 작은 생명」을 보면 그 음성은 그의 일생의 방향은 결정하게 된 소리고 그는 그 음성을 통해 자신의 할일은 “암흑 속을 걷고 있는 한국여성의 앞길을 닦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여성교육의장’인 이화를 책임지며 한평생을 살앗다고 외고한다.

김활란 박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여성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교육자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 사회 지도자, 외교가였던 그의 업적을 치하한다.

김활란 상제정론자들은 ‘한국여성 가운데 김박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빚을 지지않은 이는 한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 트레머리를 잘라 버린 최초의 단발여성,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당당한 독신 여성으로 상징되는 그를 신문화, 신교육, 신여성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김활란 박사가 총장이었던 시절 학생으로 있었던 장상 총장은 “김활란 선생님은 생종에 다락방 전도협회를 중심으로 농촌전도, 넝마주의 전도, 윤락여성전도, 청년전도를 계획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위해 직접 손길을 뻗으셨다”면서 “선생님은 ‘뜻이 있으면 일을 시작한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모든 여성들과 함께 잇어 왔다”고 그의 생애를 바라본다.

또한 이화의 전교장인 아펜셀러 교장은 그를 “명민한학자, 영감있는 교사, 유능한 행정가, 믿을만한 지도자, 이해심 많은 친구, 위대한 크리스천으로 자신의 힘을 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인물”이라며 김활란에게 “이화의 총장직은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심지어 김활란 박사의 영문판 자서전 「그레이스 서피션트」에서 매닝 팟츠 박사는 “…나는 일찍이 그렇게 많은 일을 이루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여성의 지위를 그렇게 향상시킨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까지 그를 평가한다.

그러나 김활란 박사를 비난하는 이들은 이런 김활란의 업적을은 왜곡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온 찬사란저을 지적하면서 진실을 밝혀 내야한다고 주장한다.

김활란 박사는 야마기 가쯔란으로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건물의 십자가상을 떼어내며 기숙사안에 가미다나를 세워 학생들에게 참배를 하게 하는 등 일제의 굴욕적 간섭과 명령을 따랐다.

심지어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는 연설과 징병유세에 나가고 또한 ‘애국금차회’, ‘애국자녀단’, ‘조선부인문제연구회’등을 결성,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물적·인적지원을 독려햇다.

이러한 일제말의 친일적 행동은 당시 뿐 아니라 지금가지 김활란 박사의 오점과 한계로 남아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씨는 “여성의 해방과 자아실현을 위한 그의 교육사상도 결국 고등교육만을 위한 것으로 대다수의 민중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고 말한다.

또한 조선일보 최은희 기자는 김활란 박사에 대하 8·15해방 전에는 일제의 편에,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편에 서서 그리고 민정 이양시기에는 그의 지위를 유지시키기 위해 정치세력으로서 이승만을 선택했던 사람이라며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가한다.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강정숙씨 역시 “김활란 박사는 징병·근속·징용·여자근로정신대 등의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 행동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의 안정을 도모해 왓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책임을 이화의 성장으로 상쇄 시킬 수 있는 것인가 라고 말하며 진정한 지식인이란 어쩔 수 없는 시기에도 비굴하게 살기 보다는 억압에 저항해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모님 김활란」의 저자 김동길씨는 김활란 자신도 눈병이 나 실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 다닌 죄값”이라고 말하는 등 친일 행위에 대한 반성을 햇다고 주장한다.

또한 진덕규 교수(정치외교학 전공)는 “1930~40년대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38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41년 반도는 국민 총동원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국이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우월은 이화를 지키는 건 한국여성을 더 나아가 한민족을 지키는 것이라는 확신 속에 일제의 모든 포악을 감내했다”며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를 평가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다.

김활란 박사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업적과 함께 일제 말기의 친일적인 행동에 대한 한계성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의 공로만을 치하하거나 친일행위에만 주목하는 것보다는 역사와 함께 김활란 박사 행애에 대한 이해 속에서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그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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