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는 신학생관 관련 요구안 관철과 이화내 자치흐름 조성을 위해 4월29일(수) 헬렌관 옆 숲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에 돌입햇다.

그러나 이 철야농성은 시작 14일만에 실효성에 대한 문제기와 단대사업과 병행하기 어려운 한계점 등으로 인해 지난 11일(월) 임시확대간부회의를 통해 해소됐다.

이후 중운위는 학교측의 약속에 따라 15일(금) 총장을 만낫다.

그리고 ‘69개 자치공간 확보·개방시간 11시로 연장·철야시 절차 간소화’라는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햇다.

신학생관 문제가 정리단계에 들어선 현재 이화인들은 물론이고 철야농성을 이끌었던 중운위내에서조차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한 평가와 의견은 분분하다.

그렇다면 이렇듯 철야농성이 깨끗한 마무리를 짓지못하고 분열된 양상으로 접혀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중운위 사이에 서도 철야농성의 목표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학생회장 강선영양(특교·4)은 “요구안과 목표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이화인들에게 약속한 철야농성 날짜를 지키기 위해 급박하게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의 사황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확대간부회의에서는 ‘학생자치권 확보와 학교의 궈누이주의적 태도라는 것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으므로 2개 요구안 관철을 성과로 인정하고 해소해야 한다 와 ‘달라질 것이 없는 학교의 태도 등을 미뤄볼 때 여기서 그만두면 앞으로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는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철야농성을 시작할 때부터 언제접어야 할지 원칙이 명확히 서있었어야 일관된 자세로 힘있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중운위 사이에서도 목표에 대한 공유가 잘 이뤄지지 않아 뒤로 갈수록 ‘접자’와 ‘접지말자’로 의견이 대립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선봉’에서 자치운동을 이끌어가겠다고 결의냈던 중운위들도 지쳐갔던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중우누이의 역할에 대한 고민 부족이다.

중운위는 총학생회 정·부회장과 각단대 학생회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기구에서는 특정 단대뿐 아니라 나아가 이화 전체와 관련된 문제들이 논의된다.

그러나 이번 문제를 통해 이같은 중운위로서의 역할과 단대를 대표하는 학생외장으로서의 역할 사이에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이 드러낫다.

미대 학새오히장 박상희양(섬예·4)은 “철야농성을 계속하자는 쪽으로 결정됐다 하더라도 미대 학생들이 원치 않은 상황에서 미대의 대표인 학생회장은 그 결정에 수긍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체대학생회장 박나나양(사체·4)역시 임시확대간부회의에서 “축구대회 등의 단대사업과 그외 많은 단대내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신학생관 문제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이번 학생자치운동을 신학생관 문제로만 국한시키지 않겠다는 초기의 계획과 달리 진행과정 중 각단대별의 자치권 문제까지 녹아내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봉준다.

그러나 그보다 단대 학생회장들이 중운위로서의 역할에 ㅣ해 단대 대표로서의 역할에만 너무 치중돼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대 학생회장 박지영양(사회·4)은 “자기 단대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나 중운위가 아니면 단대를 떠나 이화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몫은 누가 담당하겠는가”라고 말한다.

본지 설문조사 결과 전체 341명 중 232명(69%)이 ‘신학생관 문제는 이화 전체의 자치권 문제로 가져감이 옳다’고 대답한 점이나 중운위 역시 초기에 신학생관 문제가 일부 동아리의 문제가 아님에 동의했던 점에 미뤄볼 때 이는 중운위에서 담보했어야 할 부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담대의 상황이 학생회장들에게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화 전체와 관련된 중요한 신학생관 문제대 단대의 입장이 이러하므로 단대 학생회장인 나는 더 이상 결합 할 수 없다’고 단던했던 사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점은 바로 이화인들에게 알려내는 작업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사범대 학생회장 김현정양(수교·4)은 “그 자체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는 철야농성을 가져가겠다고 결의했을 때는 선전전 등의 대중판을 함께 진행할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그러나 이러한 결의와 달리 진행과정에서 중운위의 사고 중심이 학교측의 타협안·징계위협 등이 되면서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됐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강의실 스피치조차 철야농성 9일재가 되서야 시작됐으며 각 단대별 문제점들을 선전전을 통해 풀어내겠다고 했던 부분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와 같은 지점 때문에 이화인들의 지지 속에서 하나의 ‘구심’으로 자리잡았어야 할 철야농성이 이화인과 동떨어진 하나의 ‘섬’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명하라고 해서 서명했고 호루라기 사서 불라는 말에 호루라기도 사서 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이화인들의 토로가 대자보로, 통신 공간의 글로 여기저기 올라오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비춰볼 때 철야농성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이 우리에게 남긴 성과물이 무엇이었냐를 떠나 중우누이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은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점과 일치되지 못한 모습으로 인한 ‘불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생관 문제는 이제 서서히 정리되고 있는 시점이다.

올바른 마무리이든 아니든 간에 ‘말 많았던 ’신학생관 투쟁은 막을 내리고 이제 곧 입주가 시작될 예정이다.

이번 신학생관 문제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드러난 것은 ‘학교측으로부터 따낸 것이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다.

바로 중운위를 비롯한 우리 이화인들의 단결되지 못한 모습과 무관심함이었다.

자치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학교는 우리가 만들어낼 자치의 움직임이 커질 때에야 비로소 움직여 질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인 우리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학교 역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점이 이번 신학생관 문제를 통해 얻어낸 또 하나의 성과가 아닐까?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