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문제 토론극’이란 단어를 포스터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여성문제’라는 점에 있었던 것 같다.

나랑 여성문제를 보는 시각이 어떻게 다를까, 무엇을 여성문제라고 부르고 있을까. 나에게 여성 ‘문제’라고 했을 때는 구체적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부딪히고 있는 모순, 그것을 보다 ‘이론’이나 ‘구조’를 위한 과학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로 짜맞추기 전의 것이라는 느낌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가장 인상깊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로 ‘토론극’이라는 극형식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여성문제와 이화인들이 생각하는 여성문제는 어떻게 다를까, 같을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배우고 나왔던 점은 바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지 않는 여성문제를 풀어가는 이야기 방식이었다.

토론극은 기본적인 상황설정을 제시하고 토론을 이끌어 가는 지도부는 있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공감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궁리하고 웃고 울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나와 내 옆사람이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극이다.

이제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모든 공연에서 기본적인 상황설정, 토론될 의제는 똑같이 두 가지였다.

일을 가진 가정주부의 비애와 여성에 대한 언어적, 문리적 현태의 성희록 문제, 우리는 성희록 문제로 토론극을 만들기고 선택을 했다.

한 여학생이 하루동안 어디서나 겪게 되는 일상적인 성폭력. 미어 터지는 만원버스 안에서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여학생의 몸을 만지고 더듬고 있다.

온몸으로 저항하는 여학생을 아무도 구해 주지 않느낟. 구두가게 점원은 구두를 신겨 주면서 다리를 쓰다듬는다.

이윽고 구두가게 사장의 ‘야, 젖꼭지 한번 이쁘다’라는 한마디. 밤거리에는 건달들이 찝적거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술에 취한 남자에 까지 이르면...이런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나라면 저 장면에서는 이렇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스탑’을 시키고 그 배역을 대신 하는 것이다.

난감하고 딱히 어떻게 할 수 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할 것 같은 성희롱등에 대해 재치와 기발함이 담긴 대처와 방어를 모색한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버스에서 남자가 더듬으면 일단 현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남자의 손을 붙든다.

실정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세상에서는 증거를 잡아라. 그 사람이 계속해서 몸을 더음을 것 같은 분위기가 파악되면 그냥 놔두지 말고 예의 주시한다.

즉 얼굴을 계속해서 똑바로 쳐다본다.

뒤에서 남자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잇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남자아 자리를 바꾼다.

그리고나서 실수인 것을 가장하고 고의로 남자의 뒷통수를 친다.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고 잡아뗀다.

박수와 폭소가 터녔다.

아주 순간적으로는 이런 방법들이 정말 현실적일까 하는의문도 들지만 조금 지나면 일단 그것이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속이 시원하고 (이것이야말로 카타르시스 아닐까) 통쾌하고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왜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 엉뚱한 여자, 나쁜 여자가 보다 더 강하게 사는 것 아닐까. 구두방 사건은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일단 말이라도 해보자’라는 소극적 자세에서부터 대들고 욕설을 퍼붓고 약을 올리는 등 일회적이고 감정적인 공격이 있었다.

여성문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그것을 꼭 풀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푸는 데는 문제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해법이 필요하다.

여성문제가 구체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문제며 상황 속에서 진짜 연극처럼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해결책도 아주 구체적으로 ‘몸’으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으로 아는 해결책을 차곡차곡 비축해 두는 것이 바로 이땅에서 맨몸의 여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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