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씹는 사람, 술 취해 오바이트하는 사람, 지하철에서 감자튀김 먹는 사람. 싱가폴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이런 것들을 꼽는다.

워낙 깨끗한 나라이다 보니 냄새와 쓰레기를 우려해 차내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뿐더러 거리에 껌을 뱉는 것을 사전방지하기 위해 껌 매매 행위조차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의 눈이 미치치 못하는 곳 어디선가 껌 씹는 사람 한 두명 없을까. 뀨칙을 깨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가 아니냐던 한 현지인의 말처럼 이런 모습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싱가폴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집 살 돈이 없어 산꼭대기로 쫓겨간 사람들, 더 이상 끝간데 없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싱가폴 국민이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이 모두 부유해서가 아니다.

독립 초기부터 추진돼 온 싱가폴의 제1정책이 공공주택 정책으로, 싱가폴은 국가가 책임지고 주택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주택은행의 자료에 다르면, 1980년에 건설된 2만 1천여호의 주택 중 94.6%가 정부에서 지은 공공주책이었다.

개간이나 매입등을 통해 현재 67%에 이르고 있는 국유지를 배경으로 매년 주택건설물량의 95%정도를 국가가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함으로써 이러한 공공아파트는 민간회사가 지은 아파트보다 몇배나 싼 가격으로 분양되고 있어 국민은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민간 아파트는 극상류층만이 소유할 수 있고, 국민 대대분은 공공주택에서 살고 있다.

). 또한 공공주택 아파트 입주자들은 주택가격의 80%까지 최장 20년간 주택가격의 80%까지 최장 20년간 주택개발청의 융자를 받을 수 있어 손쉽게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융자금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봉급 중 매달 일정액을 적립하게 되어 있는 CPF라는 연금에서 자동 상환되기 때문에 이를 갚기 위해 아둥바둥 하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싱가폴 국민에게 내집마련은 일생을 걸어야 하는 중대한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보조금, 융자금까지 지원해 준다니, 사실 정부가 돈만 있다면 가능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방위비 지출이 없는 싱가폴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고. 하지만 독립초기의 싱가폴 주택정책을 보면, 단순히 재정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부의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싱가폴 정부는 주택건설에 잇어서 우선적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을 공급하고, 그 이후에 상위소득에 준하는 주택을 공급해 왓다.

1973년 이전에는 철저히 저소득층 대상의 주택만을 지었을 뿐, 민간회사가 짓는 주택조차 중산층 대상의 고급아파트는 허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가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중산층 이상을 정책대상의 우선순위로 삼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주택은 재산증식의 개념이 아니라 주거다누이로서의 개념이라는 인식이 정부의 정책에 의해 확고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잇는 것이다.

비록 싱가폴 정부의 주택정책은 인종화합 등 정치적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싱가폴이 절대적인 이상은 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싱가폴 국민의 80%가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다.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나머지 20% 또한 정부의 보조금과 융자를 얻어 안정적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서울을 한번 바라보자. 2백8십만 가구 중 전세든 월세든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가구가 1백7십만, 60%를 웃돈다(인구주택조사보고서, 1990). 4인 기준에 한칸짜리 셋방을 전전하거나, 독립적인 화장실 및 부엌을 갖추지 못한 가구가 75만이나 된다.

(한겨레21, 1995년 신년호). 철거민들이 철거깡패에 쫓겨 망루위로 올라갔다가 밑에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떨어져 죽은 사건이 지난 2월 서울 한가운데서 발생했다.

주택은 주거의 개념이라고, 주택의 공공성을 부르짖어도 돌아오는 것은 돈이 없으면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아니냐는 논리일 뿐이다.

하긴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사회에 돈이 없으면 쫓겨나야 한다는 어쩔 수 없다는 가치가, 너무나 당연히 여겨지는 이가치가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라면 싱가폴 국민과 같은 어떤 사람들은 왜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있는지. 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누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지. 싱가폴 국민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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