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채플을 듣던 날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44년만에 다시 이화여대생으로 돌아온 박영(간호·3)씨를 만났다.

그는 올 1월말, 이화의 금혼 학칙이 폐지되면서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21명의 복학생 중 한 사람이다.

그는 46년전 57학번으로 이화에 입학했지만 당시 넉넉치 못했던 집안 사정으로 휴학하던 중 결혼을 하게 돼, 결국 3학년에 진학하지 못한 채 이화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여자가 대학 공부까지 한다는게 쉽지 않던 시절, 박영씨는 농사짓던 시골마을의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어려운 집안의 5남매 중 맏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예로움의 상징’이던 이화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배움의 길을 걷는데 남녀구분을 두지 않으셨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불편하신 몸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해서 간호학과를 선택했었다.

그랬던 그가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을 때의 심정을 묻자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말로 다 할 수 없이 섭섭했지요”라고 답한다.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지만 간호의 길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지난 30년간 병원과 노인요양원에서 물리치료사로서 일하며 불편한 사람들을 도왔고, 재작년에 정년퇴임했다.

그런데 올 초, 신문을 읽던 그의 눈에 뜻밖의 기사가 들어왔다.

이대의 금혼학칙이 폐지돼 재입학 신청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란 마음에 복학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학교 졸업이 아내의 평생 아쉬움으로 남은 것을 아는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복학했다.

‘왜 뒤늦게 고생을 하려 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남편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서 복학 준비를 도와줬다.

그는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온 귀하고 은혜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03년 2학기, 그렇게해서 그는 44년만에 다시 교정을 밟았다.

그날의 벅차 오르던 감동은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지금 19살의 룸메이트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한다.

18학점의 간호학 수업도 꼬박 채워 듣는다.

그는 “미진한 공부도 채우고 레포트도 써야되고, 실습도 하고 시험도 보려면 주말이 되도 우리 할아버지(남편)랑 애들 만나러 갈 시간이 없어요”라며 웃는다.

가끔씩은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이 들지만 그래도 뒤늦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학교 생활과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는 같은 과의 도우미 친구를 만난 것도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이 시간을 잘 마치고 졸업을 하면,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불치병에 걸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어요”란 말을 전하던 그의 방엔 오늘도 새벽까지 불이 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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