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로는 「민주화 주도세력」을 기존의 정치세력, 또는 사회세력 중에서 택일하려는 다소 성급한 자세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 확실한 민주화 주도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도세력이란 운동과 투쟁의 실천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한겨레신문이 지금 할일은 특정정치세력, 또는 그 노선과 자신을 일치시키려 하기보다는 현 상황에서 민주세력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는데 지혜를 모아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겨레신문과 다른 매체와의 차별성은 권력으로부터의 분명한 독립성외에 촌지거부등과 같은 기존언론의 잘못된 관행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또 그동안 국민의 시야에서 감춰져왔던 언론의 비리에 대해 감시·비판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촌지거부등의 언론 도덕성 회복노력이 국민독자의 신뢰를 뢰복, 여러 비판적 국민들의 제보가 있었다고 한다면 기존 언론에 대한 감시·비판활동은 기존언론의 분발과 지성을 유도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촌지수수등 취재원과의 밀착(또는 유착)에 의해 취재·보도가 이루어지는 우리의 언론상황속에서 한겨레신문의 순수성유지노력은 뜻하지 않은(?)불이익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보의 부족현상」이다.

특히 제도정치권의 동향에 관한 정보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정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주고받기」에 의해 교류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항상 제도권정당(특히 여당)에 대한 비판의고비를 늦추지 않은 한겨레신문기자에 대해서는 진짜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이익은 결국 한겨레신문의독자성이 독자성으로만 끝나지 않고 다른 언론매체의 동참을 끌어낼 수 있을 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촌지거부, 언론에 대한 자기비판등으로 일정한 독자성을 보였다고는 하지만 기존언론관행의 틀을 깨부수지 못하고 그에 동화돼가고 있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취재시스템의문제다.

현재 우리 언론의 취재관행은 정부부처를 비롯한 출입처에 출입기자를 고정배치하여 이들 취재원이 제공하는 정보를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이러한 출입처중심의 취재관행은 정보자체가 취재원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취재원과 출입기자의 유착에 의해 사회현상의 편향된 인식을 가져올 위험성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창간당시 한겨레는 이러한 출입처 중심의 취재관행을 탈피, 분야별 전문취재를 지향하고 나셨다.

경제담당기자를 국회상임위에 출설시켜 정치와 경젱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정치부와 경제부를 한데 묶어 정치경제부를 만들고 민족통일문제를 국제정세의흐름 속에서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민족국제부(외신부)기자가 외무부·통일원·국방부(기존 언론에서는 정치부, 사회부에서 출입)를 출입하게 하는 등 취재시스템의 쇄신을 꾀했으나 3년이 지난 지금 한겨레신문의 취재시스템은 기존언론의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정착되고 말앗다.

한겨레신문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언론기업으로서의 위상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겨레신문 창간초기부터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잇다.

단적으로 그것은 한겨레신문이 지향하는목표와 한겨레신문이 처해있는 현실적 조건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한겨레 신문은 그 자신의 이념을 모든 분야에서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기여하는 「민주언론」, 민족자주화에 의한 평화통일을 앞당기기위해 노력하는 「민족언론」, 소외당하고 고난받는 민중의 생활권을 확보해주고 향상시키는데 기여하는 「민중언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겨레신문은 「절대로 특정사상을 무조건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때문에 한겨레신문이 대중지냐 특정계층지냐는 논란이끊이지 않고 있으며 실제로 한겨레신문의 태도는 이러한 구분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채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조건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간초기 증권시세표와 프로스포츠보도에 관한 논란 끝에 이를 게재키로 한 점, 소외계층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반면 실제 독자층은 중상층위주로 돼 있는 점, 민자당의 홍보광고나 관정성 기구의광고등은 배제하면서 「노동해방문학」지지광고나 이철규씨 사진게재등을 거부한 것등은 한겨레신문 정체성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한 언론사가 모든 것을 이루어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된다.

결국 변화라는 것은 변화의 대상이 되는 현실속에서 몸을 던져 진흙투성이의 싸움을 하면서 변화의 대상과 주체가 더불어 변화해나갈 수밖에 없으며 한겨레의 앞날은 좀더 관심과 애정을가진 비판 속에 성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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