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과 졸업생들 성폭력 비대위 인터뷰

  “이화여자대학교 조소전공 졸업생으로서 더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데에 뜻을 모아 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20일 페이스북 페이지 ‘이화여자대학교 조소전공 성폭력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 올라온 공동 성명서 일부다. 이번 비대위는 한 조형예술대학(조예대) 조소과 학생의 미투(#MeToo) 폭로를 계기로 모이기 시작했다. 조예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대위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해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조직됐다. 본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2일 본교 ECC에서 비대위를 만났다.

 

  -비대위 구성원이 모두 조예대 ‘졸업생’이다. 어떤 계기로 어떻게 모이게 됐는가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온 후회와 절망이 후배들에게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모이게 됐다. 19일 오후7시부터 자정까지, 다섯 시간 만에 졸업생 29명이 모였다. 그만큼 우리는 절실했다.

  지금에서야 공론화된 K교수 문제는 조예대 내부에서 약 10년 전부터 거론된 문제다. 내부에서는 그 행동이 잘못됐음을 숙지하고 있었지만, 우리도 재학생 시절에는 용기 있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 일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선배’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하기 위해 비대위를 꾸리게 됐다.

  그때의 우리처럼 아직도 잘못된 교육을 받으면서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후배들이 있다.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추가적인 피해를 막고자 했다. 단순히 졸업생 일동이라는 말보다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주면서도 우리의 간절함을 호소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실명까지 밝히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예술 분야의 경우 판이 좁기 때문에 고발 사실이 알려지면 앞으로의 커리어에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아 보인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행동이 커리어에 불이익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커리어는 각자의 능력으로 쌓는 것이기 때문에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인맥을 쌓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작가로 열심히 작업하다 보면 타인의 지위를 이용하기 위한 인위적 인맥이 아닌 자연스러운 인맥을 구축해 나갈 수 있고 이는 긍정적인 인맥으로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우리도 학부생이나 대학원생 시절엔 미술계에서 교수님들이 굉장히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학원 졸업 후 작가로 활동하며 보니 단 한 명의 교수가 우리의 인생이나 커리어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와 관련해 고민하는 후배가 있다면 누군가가 나랑 더 친분이 있다고, 더 힘이 세다고 해서 나의 커리어를 크게 도와주거나 망칠 수 없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한다.

 

  -약 10년 전 상황도 지금과 비슷했나. 그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피해를 보았나

  재학생 시절에 일주일에 몇 번이고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작업 활동을 하다가도, 밤늦은 시간에도 K교수에게 전화가 오면 바로 나가야 했다. 원치 않는 자리에서 불편한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10년 후 보니 남들이 열심히 경력을 쌓던 시기에 우리만 그러지 못했더라. 그렇게 2~3년의 세월을 낭비하고, 그 후 낭비한 시간을 돌아보며 후회하니 10년이 흘렀고 아직도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화나는 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도구로 활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자 남성에게 너의 성을 이용해 인맥을 쌓고 이익을 얻으라’는 식으로 말을 해왔다. 학생들을 세뇌하겠다는 의도는 없었을 수 있지만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교수의 교육을 습득하고 체화한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점점 무뎌가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대학의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이런 언행과 태도를 일삼았다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교수의 성추행이 10년 넘게 지속돼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제야 문제가 공론화된 배경에 학과 내 환경적인 요인도 있다고 생각하나

  전공의 폐쇄성, 교수와 학생 사이의 권력 구조 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조소과의 경우 인원이 굉장히 적기 때문에 교수와 제자의 관계가 타과보다 좀 더 끈끈한 것 같다. 작품에 대해 깊숙이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고 사적으로 작업 이야기를 풀어갈 때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감이 쌓이기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울 때가 생긴다. 내가 따르고 믿는 선생님이 하는 말씀은 다 옳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합리적인 판단이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

  대학 내에서 교수에게 주어지는 절대권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다. 특히 학생 수가 적은 과의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교수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는 10년 전에도 이러한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이는 당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보다 침묵하고 가만히 있던 사람이 더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권력 구조 속에서 계속되는 악순환이 지금까지 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싶다.

 

  -조소과 외에도 미투 고발이 계속되고 있다. 학교 측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제대로 된 교육자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에 있는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줬으면 한다. 또, 지금처럼 교내 미투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문제를 학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도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학교의 대처 방안이 곧 학교가 이 상황을 얼마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냐를 나타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을 때까지 학교에서 끝까지 힘써주길 바라며, 과연 현재의 내부 규정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학생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 명의 교수는 졸업 후 현장에서 당신에게 그 어떤 이익도 불이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권력자 일부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지 말았으면 한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용기를 갖고 그곳을 박차고 나오길 바란다.

  자기주체성을 갖지 못한 사람은 결코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성폭력 문제는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학생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회 전체의 문제다. 우리가 받아온 상처는 하루 이틀 후에 아무는 상처가 아닌, 놔둘수록 썩어가는 상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계속되는 악순환을 주체적으로 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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