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려 들지 마.”, “너가 잘 하면 되지. 능력으로 이겨야 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차오를수록 엄마와의 대화는 내가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모르는 걸까, 엄마는 딸이 이 사회가 변해야만 더욱 더 큰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엄마와 대화를 하며 참 많은 시간과 감정과 눈물을 소비해야만 했다.

  엄마도 회사를 다녔었다, 언니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도 한 회사의 구성원이었고, 더 나아가 이 나라의 경제활동의 주체였다. 그도 회사생활에서 참 많은 고통을 받았다. 엉덩이 혹은 허벅지를 쓸고 지나가는 상사, 브래지어 끈을 당겼다가 놓는 장난을 하는 남직원, ‘00씨 그날이야?’라고 묻는 동기, 하나의 회사 속에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인물들이 아주 조화롭게도 뭉쳐있다. 하지만 화를 내지 못 했다. 화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날, 이걸 뒤엎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문화’라고 부르기도 추하고 더러운 ‘추태’를 꺼내기 어려운 기억 속에서 다시 펼쳐냈다. 연이어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당하는 문화 속에서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던 엄마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고 있다. 피해자가 피해자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이다. 피해자인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인식하는 것도 크나큰 고통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서의 사건들을 다시 정리하고, 바로잡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고통과 불가능함 속에서 엄마는 더욱 더 생각을 지우고 자신의 딸은 그저 개인을 위한 삶을 살기를, 능력에 따른 삶을 살기를 바라며 현실에 대한 눈을 가린 채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바뀌지 않을 것 같으니까, 누구보다 더 능력있기를, 들이받으려 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능력만으로 인정받기를, 힘들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의 엄마들에게 자신들이 살아온 길이 한 사회 구조의 문제 속 피해자의 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자괴감과 허탈감,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뉴스를 보는 엄마는 말이 없다. “저런 사회 살아오느라 고생했어, 엄마. 이제 우리가 바꿔볼게.” 예전처럼 엄마는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쁜 놈들은 벌을 받아야 해. 저런 짓을 죄책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했겠지. 추잡하다.” 이제 우리는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엄마가 고통받던 그 길을 지워내고 새로 쓰는 것이다. 슬픔이 아닌 분노로 가해자들을 향해 소리치는 것, 그리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드는 것이 엄마의 삶에 대한 앙갚음, 그리고 이를 넘어서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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