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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광은 잊고 새 시대 선도하는 새 가치 만들길
2017년 05월 29일 (월) 양선희(교육·87년졸) 소설가, 중앙일보 논설위원 -

  이화를 생각하면 가슴 속에선 묘한 격동이 일곤 했다. 그 내용은 늘 바뀐다. 예전엔 감동과 긍정적 에너지가 강했다면 요즘은 화증(火症)과 비슷하다. 지난해 온 나라를 벌컥 뒤집었던 ‘이대 사태’때문이 아니다. 좀 더 오래 됐다.

  밖에서 보는 이화는 어느 순간부터 빛나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30여 년 전 이화는 일명 SKY(서울대,고대,연대)와 더불어 한국 4대 명문으로 의심 없이 꼽혔다. 그러나 그 후 SKY는 제자리인데 이화는 계속 다른 학교들에 밀려 내려갔다. 물론 대학 서열이 별 의미가 없는 요즘 이런 순위 때문에 마음이 상한 건 아니다.

  다만 대학들마다 ‘혁신’을 부르짖으며 나이든 총장들이 젊은이들 춤을 추면서 ‘점점 더 젊어지는 대학’을 향해 몸부림치는데, 이화는 반대로 활기를 잃고 무기력하게 늙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이대 관련 행사에선 어른들이 ‘옛 이화의 영광’에 대한 추억담만 잔뜩 늘어놓기 일쑤였다. 회고가 길면 현재의 실력과 미래의 비전을 의심받게 된다.

  이화의 리더들은 또 언론에 불만이 많았다. ‘교수들은 여러 연구 성과를 내고,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하고, 외부에선 많은 인정을 받고 있는데 언론에선 써주지 않는다.’는 게 주된 불만이었다. 언론인이 된 이후 반복해서 수없이 들었던 불만이다.

  몇 년 전 이화언론인클럽 모임에서도 총장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시기에 나도 마이크를 잡고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예쁘고 착하고 공부 잘한다고 칭찬까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타고난 행운에 감사하고, 그 행운을 어떻게 공공을 위해 나누고 활용할 것인지 고민해라. 또 대학이 연구실적 높고 학생들 공부 잘하는 건 당연한 본분인데, 자기 할 일 하면서 칭찬받지 못 하는 데 불만을 제기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못 되고 모진 말이었기에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었다. 그래서 한번은 대기업 간부인 이대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얘기를 했다. 한 후배는 자기 회사 CEO를 수행해 이대 강연에 다녀오며 민망했던 이야기를 했다. CEO의 강연이 끝나고, 총장님과 차 한 잔을 하는데 총장님이 “그 회사는 이대생을 너무 안 뽑는다. 앞으로는 많이 뽑으라”며 직설적으로 요구하더라고 했다. 어느 대학이나 CEO들이 가면 졸업생들 취업부탁을 받게 되지만 불편하지 않은 의전적인 화법을 동원하는데, 이대에선 그 태도가 마치 ‘맡겨놓은 물건 내놓으라’는 식이어서 당황스럽더라는 것이다. 후배는 “이렇게 사회성과 의전적인 예의라곤 없는 태도에 민망해져서 학교를 나오며 자동으로 머리 숙여 CEO에게 사과하게 되더라”고 했다. 그러자 그 CEO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뭐, 이대잖아.”

  개인적으론 일반 사회의 의전이나 화법과는 좀 다른 일부 여성계의 다소 전투적인 직설화법에 익숙하고 이해도 하는 편이다. 한국에서 지난 한 세기는 여성사에 있어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수백 년 이어온 여성에 대한 절대적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고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여성계는 치열하게 투쟁했다. 투쟁과 쟁취의 과정엔 우회적이고 의전적인 화법으론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에 그에 걸맞은 직설화법이 필요했다. 여성이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여성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현장의 선두엔 언제나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아는 이화인이 있었다. 마침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 이렇게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기까지 이화는 그 역할을 200% 이상 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면 행동양식도 사고방식도 적절하게 변화해야 하는데 이화는 멈췄고, 우리 사회에 어떠한 어젠더도 제시하지 못했고, 정신적으로 퇴보하는 듯이 보였다. 물론 여성지위향상이라는 한 세기의 사명을 완수했으니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해서였다고는 이해한다. 그러다 지난해 미래라이프대학 갈등에서 시작된 ‘이대사태’를 보며 나는 오히려 안도했었다. 이런 격정과 격동은 긴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다.

  이제는 갈등을 넘어 새롭게 전진할 방향을 잡아 다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화의 손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많다. 한 예로 여성 전체에 대한 차별은 제도적으로 사라졌지만 아주 디테일하게 접근해야 하는 차별과 소외는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있다. 여성 전체가 아니라 일자리 차별, 미혼모, 성소수자, 빈곤층이나 점차 급증하는 남성의 소외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젠 ‘여성’의 범주에 갇히지 않고 모든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지 모른다.

  이는 인간사회의 소외되고 그늘진 곳을 살피고, 약자들을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인도하는 이화의 건학이념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차원이 다른 섬세함으로 새로운 논리와 실행 방안을 개발해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능력과 자산은 불평등하게 타고 났기에 공부 잘하는 사람은 더 많이 공부해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에 앞장서야 하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과 나누면서 세상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 세상을 순행하도록 하는 원리다. 혜택 받은 사람은 그만큼 공공선을 위해 더 헌신하고 노력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갖는다. 이화인은 특히 이 땅에서 차별받던 여성 중 혜택 받은 여성들이었기에 그동안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 일에 더욱 헌신해온 게 사실이다. 이젠 그 헌신의 영역을 여성을 넘어선 더 넓은 공공선으로 넓혀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간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노동에서 해방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엔 경쟁·투쟁·쟁취가 아니라 협력·연대·배려·존중·공감 등이 주요 가치가 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예견한다. 이화는 낮은 지위와 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했던 한국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데 이론적·실천적 에너지의 근원이었던 만큼 우리 사회에서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경험과 노하우가 가장 풍부한 대학이다.

  이화의 새 리더십은 이화의 옛 영광을 그만 잊었으면 한다. 이젠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새 가치를 창출해내야 한다. 이화는 새 사명을 성공시킬 저력이 있다. 이화인들 모두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사명에 대해 자각하고, 뒤돌아보지 말고 투정부리지 말고 우직하게 앞만 보고 나갔으면 한다. 과거 척박했던 시절 좌고우면 않고 앞만 보고 나갔던 우리 선배들의 정신만은 계승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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