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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에서부터 행동으로, 여전히 변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강남역 살인사건 그 후로 1년
2017년 05월 29일 (월) 전혜진 기자, 정선아 기자 diana7737@ewhain.net, ssuna212@ewhaian.net
   
 
  ▲ 그래픽=이화미디어센터 박현기 조교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작년 5월17일 새벽, 강남역 인근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흉기로 수차례 찔려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묻지마 범죄’로 치부됐다. 그러나 범행 이유가 밝혀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가해자는 “여성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여성이 화장실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죽였다”고 밝혔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사건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특히 피해자 또래의 20대 여성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사건 다음 날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포스트잇 추모가 시작됐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 ‘나일 수도 있었다’라는 추모와 경계심을 담은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을 뒤덮었다. 이후 도심 한복판의 강남역 10번 출구는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문제를 지적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지난 17일은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였다. 여성혐오 범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1년 후, 한국의 페미니즘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본지는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강남역 살인사건과 그 이후의 페미니즘을 분석했다. 자문은 본부 소속 연구기관 한국여성연구원 김주희 연구위원이 맡았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첫 번째 특징은 ‘연대’다. 그간 주로 온라인에서 공감을 나눴던 사람들이 사건 이후엔 거리로 나와 직접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강남역을 애도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만남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연대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만들었다. 

  김 연구위원은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운동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실질적 만남, 즉 정신적인 연대를 넘어선 실제 ‘몸’들의 연대였다”며 “과거 온라인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강남역에서의 실제 만남을 통해 광장까지 이어지는 정치 세력화를 이뤄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같이 다양성에 기반한 연대가 중요한 이유는 페미니즘이 단순히 한 이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꾸는 정치학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특징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 변화’다. 이전의 페미니즘은 주로 학문적 차원에서 논의돼 일반인의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 자체가 새로운 지식과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졌다. 이런 경험의 공유는 광범위한 공감을 가능하게 했고 나아가 페미니즘에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김 연구위원은 “과거 페미니즘은 학문으로서 배운 자와 아닌 자로 양분돼 후자는 다소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이제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만으로도 페미니즘적 지식과 근거가 된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학문으로서 여성학을 공부했느냐의 여부를 떠나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경험 자체로 서로 연결돼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훨씬 더 광범위한 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수치로도 알 수 있다. 도서판매 사이트 예스 24에 따르면 여성학 도서 판매율은 2011년부터 4년간 하락세를 이어가다 2015년 8.8%로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2016년에는 113.8%로 크게 증가했다. 페미니즘 도서 열풍 중심에는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예스 24 조사에 따르면 여성학 책을 산 사람 중 10대 여성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2.4%, 20대 여성은 404.9%로 각각 거의 네 배씩 증가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도 역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도서 붐이 불었다. 2014년만 해도 여성학 분야 도서 구매자 중 40대가(37.4%) 가장 많았지만 2016년에는 20대가(47.2%) 압도적으로 많았다.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일어났을 때 ‘페미존’이 만들어졌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단순히 한 명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통령의 탄핵에는 찬성하지만 ‘닭년’, ‘병신년’,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등의 성차별적인 발언은 멈추라는 목소리를 함께 내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강남역 살인사건은 이전에는 어떤 인연도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페미니스트라는 연대감으로 함께 실제 모임을 통해 활동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물질적 연대’를 하게 했다”고 평했다. 

  페미니즘 운동의 변화 양상은 대학가에서도 나타났다. 본교에서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기존 이화여성주의학회를 비롯해 꼴페미 양성소, 우리는 생각한다와 같은 단체에서도 적극적인 행동 위주의 페미니즘 운동이 있었다. 꼴페미 양성소는 ‘꼴페미’라는 단어를 풍자하면서 대동제 때 직설적인 페미니즘 굿즈를 만들어 판매해 재학생들의 인기가 높았다. 우리는 생각한다 역시 ‘여성혐오를 생각한다’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학외에서도 20대 여성들을 주축으로 여러 페미니즘 단체들과 학회가 생겼다. 페미니스트 정당 준비모임 ‘페미당당’은 강남역 사건 이후 '거울행동' 이라는 침묵시위를 진행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14일에는 강남역 사건 1주기를 맞아 '여성혐오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페미당당에서 활동하는 서예윤씨는 “거울행동은 강남역 거리에서 근조 리본을 단 거울을 들고 걸으며 시민들에게 이 일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타깃이 될 수 있었던 여성혐오범죄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한 활동이었다”며 “우리 모임은 원래 페이스북으로 소통하는 것 외엔 특별한 활동이 없었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고 오프라인 회의를 거쳐 이 행동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페미당당은 또한 지난 대선을 앞두고 광화문 광장에서 ‘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라는 직접행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페미니즘 연대 활동에 대해 서씨는 “우리의 목소리를 잘 들릴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연대라고 생각한다”며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통해 소통하며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나 위로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페미당당’을 비롯해 ‘강남역10번출구’, ‘불꽃페미액션’등 여성주의 단체로 구성된 범페미네트워크에서는 지난 17일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제를 기획했다. 이 추모제에는 약 1000명이 참여했다. 범페미네트워크 활동가 안현진씨는 “강남역 사건은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며 “사건 이후 많은 페미니즘 모임들이 생긴 것은 더 이상 여성혐오에 침묵하지 않겠다, 직접 행동하겠다는 의사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안씨는 또한 “많은 페미니즘 그룹들이 생긴 것 외에도 사람들이 미디어나 광고 속에 등장하는 표현 하나에도 민감해졌다?며 ?성폭력이나 낙태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이렇게 곳곳에서 보이는 작은 문제제기와 싸움들이 사회변화를 크게 가져오고 있다”며 “혼자하기 힘든 일이라도 함께 할 때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연구위원은 “페미니즘이 부상하는 시기에 관련 동아리나 모임이 많이 생기는 것은 자연적인 수순”이라며 “교내에서의 이런 변화도 페미니즘이 확산되는데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페미니즘은 억압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기 위해 있는 것”이라며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남는 게 아닌, ?이화를 아우르는 지식체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나아가 대학문화, 청년 문화 그리고 한국 사회까지도 이런 가치가 주류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페미니즘 동향에 대한 재학생들의 의견은 어떨까. 이현정(사교·16)씨는 “강남역 살인사건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던 성차별적 시선과 의식을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성평등을 주장하는 방식이 이전에는 ‘정도(正道)’만을 걷던 느낌이라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는 ‘착한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포기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보여주는 ‘미러링’이 더 강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들 스스로도 변화가 생겼다는 반응도 있다. 박한솔(사교·16)씨는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위험들이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된 계기”라며 “이 사건을 통해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인지하고, 근본적 원인인 여성혐오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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