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한테 명품백 하나 사달라고 해야겠네.”

  이화여대 합격 소식을 알리자마자 들은 말이다. 이 표현은 이대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굳이 ‘된장녀’나 ‘김치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많은 이화인을 모욕할 수 있다. 그러나 지인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딴에서는 위트 있게 합격 소식을 축하하려 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발화자도 알아채지 못하는 명백한 혐오라는 점. 당시의 나는 그 말에 콕 짚어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했다. 

  사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옛이야기를 꺼내 구구절절한 글을 쓰려는 까닭은 뒤늦게 그 지인에 대한 험담을 하려는 것도, 때 늦은 분노를 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3년하고도 5개월이라는 시간을 이화의 구성원으로 지내면서 그 옛날에 느낀 알 수 없는 불쾌함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빠한테 명품백 사달라고 해야겠다”는 말은 여성의 경제 능력을 무(無)로 치부하고 여성을 단지 ‘소비’의 주체로만 상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내가 그들의 ‘농담’에 반박할 때 돌아올 ‘불편러’라는 준비된 비난까지도 불쾌하다.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니면 수많은 이화인을 만날 수 있다. 혹자는 에코백을 메고, 혹자는 백팩을 메고, 혹자는 그것도 모자라 입학 축하 선물로 학교에서 나눠준 작은 손가방에 필기구와 노트를 꽉 채워서 들고 다닌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례를 나열함으로써 “우리 학교는 이렇게 소탈한 학생들이 많다”는 해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명품백을 들고 다니든, 에코백을 들고 다니든, 보따리에 짐 싸서 다니든 그게 왜 왈가왈부해야 할 일인가. 애초에 저런 명제는 해명할 가치도 없다. 

  ‘이대생들은 명품백만 메고 다닌다’라는 문장 속에 담긴 의도가 너무나 저열한데 이 시시콜콜한 내용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 자체가 본교생으로서는 달갑지도, 가치 있지도 않다. 다만 다수의 구성원이 모여 있는 집단을 하나의 명제로 획일화하고, 이를 통해 얼토당토않은 혐오를 확산하려는 게 비난받을 일임을 분명히 하고 싶을 뿐이다. 이화여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집단이다. 그 속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다 모여 있다. 어떤 명제로 획일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명품백’이라는 단어에 상상 속 여대생들의 사치와 허영을 투영시키고, 다시 이대생과 명품백을 병치하면서 이화여대생은 사치스러운 여자들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낸다. 왜 우리는 웃기지도 않은 편견을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사람 앞에서 유쾌한 척 그것을 넘겨야 하는가. 그 말 속에 담긴 혐오가 분명히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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