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머니는 여든세가 넘으셔도 틀니 한번 안하셨던 건강한 분이다. 서산에서 외할머니는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작물을 이모와 외삼촌, 그리고 우리집으로 보내곤 했다. 매년 겨울이면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김장을 하셨다.

  그런 외할머니께서 2주전 급격한 건강악화로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 2년 전, 화장실에서 넘어지신 후 외상을 비롯해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2년간 일반병실과 요양원을 생활을 하셨다. 중환자실로 병실을 옮겼다는 엄마의 말은 유독 무게가 있었지만 워낙 건강하신 분이었기에 잘 견디시길 바랐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은 평소처럼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만나는 것만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의 영정을 보지 못하고 바로 옷을 갈아입은 후 일만 했다. 밤이 깊어 가족만 남았을 때 비로소 홀로 외할머니를 보았다. 이제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사진 앞에 조용히 국화를 올렸다.

  누가 죽음 앞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없는 시간을 쪼개 중환자실을 다녀오며 충분히 외할머니를 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웃음도, 손길도 그저 기억으로만 느낄 수밖에 없기에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죽음’은 나로 하여금 공허함과 허무함에 빠지게 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 TV에서는 세월호의 인양 소식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세밀함과 정밀성이 요구된다는 인양은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5일 만에 올라올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맞닥뜨린 누군가의 죽음도 이렇게 힘든데,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뉴스를 통해 올라오는 세월호를 보며 3년 전 세월호의 유가족들의 마음을 돌아봤다. 당시 ‘정말 슬프겠다’라는 단순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픔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했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방에 걸었던 노란리본의 무게감은 달라졌다.

  세월호가 온전히 올라오면서 의혹과 논란거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시국은 불안정하고 대선을 앞둔 가운데 세월호 사건을 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중한 이의 죽음을 직면한 입장으로서 우리는 아픔의 무게를 함께 느꼈으면 한다. 누구나 하니까 하는 노란 리본과 단순히 인양되는 세월호 관련 기사 댓글의 무게감을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또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의 진실이 다시 가라앉지 않게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3년의 시간에 잠겨있던 세월호는 무사히 인양돼, 현재 목포까지 이르렀다. 녹슬어 이름도 보이지 않는 세월호의 모습은 장례 예식이 끝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4일은 청명(淸明) 하늘이 맑아지는 절기다. 시신 미수습자의 마음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맑은 봄 하늘을 맞을 수 있게, 나는 작지만 꾸준한 관심으로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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